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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영화

시민 케인 (1941)

시민 케인 포토  
감독 오슨 웰즈
개봉일 1941,미국
별점
date : Sep 16, 2005 / film count : 2352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라는 신문 재벌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다. 이 영화를 제작할 당시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는 살아 있었고, 이 영화를 자신을 모델로 만든다는 것에 대해서 불만을 많이 품었다고 한다. 이러한 정황으로 봐서도 그렇고 이 영화에서 초반부에 주인공 케인이 죽는 것을 봐서도 그렇고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기 보다는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라는 인물을 모델로 한 영화(허구)라는 얘기이다.

이 영화를 보고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라는 인물에 대해서 찾아보았다. 신문 재벌이며 당대의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언론 거목이고 소비가 극심했던 인물로 현재는 관광지로 유명한 '허스트 캐슬'이 그가 살았던 성(저택)이라고 한다. 영화에서 케인 또한 이 허스트를 모델로 했기에 웅장한 성에 각종 그림과 조각들을 수집하는 인물로 그려졌는데 이것이 어떤 비판 의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영화의 주제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단순한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

이 영화가 왜 찬사를 받는 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그렇다고 비판의 대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지금 봐도 전혀 구시대적인 영화라고 생각이 안 드는 것은 최근에도 이런 영화는 얼마든지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워드 휴즈를 그린 '에비에이터'가 그 일례라고 할 수 있겠다. 결국 어떠한 인물의 일대기와 같은 영화이기 때문에 나에게는 뭐 볼만한 영화라고는 생각되도 모든 세계의 평론가들이 Top 10 리스트에 올릴 만한 영화라고는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내가 그 당시 즉 영화를 촬영한 당시인 1940년대의 사람이 아니라 어떠한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러는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영화의 위대성은 내가 논할 바가 아니라 생각하는 바이다. 이 영화의 주제는 단순히 어떤 인물의 일대기가 아니라 케인이 죽으면서 남긴 '로즈버드'라는 말의 의미를 알아내기 위해 기자가 케인의 부인들과 친구들, 주변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야기가 진행이 되고 결국 관객들에게만 살짝 보여주는 '로즈버드'의 실체를 통해서 관객에게 메시지를 남기는 데 사실 그리 강렬한 메시지라고는 생각되지는 않는다.

내용은 지루하지 않고 볼 만하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류의 얘기라 재미있게 본 것 같다. 다만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실존 인물을 단순히 모델로 해서 했다는 점이라 실화와 같은 감동은 없지만 영화 내러티브 자체가 또 감동을 줄만한 요소는 없었다고 보인다.

다음은 "영화 매니아라면 봐야할 100편"의 평론이다.

영화의 역사는 1941년 5월1일 개봉한 <시민 케인>에서 다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어떤 영화도 이제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영화의 모든 사고에 새로운 배치가 이루어졌다. 역사는 갑자기 인식론적 단절을 경험하고, 고전주의 영화의 시대는 그 막을 내렸다. 그리고 <시민 케인>은 모더니즘 영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오손 웰즈(1916∼1985)는 셰익스피어의 열렬한 추종자였으며, 체홉과 입센에 정통한 연극연출자였다. 그는 22살에 머큐리 극단을 결성하여 실험극을 시도했지만 후원자는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래서 먹고 살기 위하여(!) 라디오 드라마 연출을 맡기도 하였다. 그리고 38년 10월30일 CBS 라디오에서 "임시 뉴스를 알려 드립니다"로 시작하는 가상 화성인 침입 드라마 <우주전쟁>으로 라디오 역사상 유례없는 소동을 일으켰다.

영화의 역사는 1941년 5월1일 개봉한 <시민 케인>에서 다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어떤 영화도 이제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영화의 모든 사고에 새로운 배치가 이루어졌다. 역사는 갑자기 인식론적 단절을 경험하고, 고전주의 영화의 시대는 그 막을 내렸다. 그리고 <시민 케인>은 모더니즘 영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오손 웰즈(1916∼1985)는 셰익스피어의 열렬한 추종자였으며, 체홉과 입센에 정통한 연극연출자였다. 그는 22살에 머큐리 극단을 결성하여 실험극을 시도했지만 후원자는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래서 먹고 살기 위하여(!) 라디오 드라마 연출을 맡기도 하였다. 그리고 38년 10월30일 CBS 라디오에서 "임시 뉴스를 알려 드립니다"로 시작하는 가상 화성인 침입 드라마 <우주전쟁>으로 라디오 역사상 유례없는 소동을 일으켰다.

오손 웰즈는 그 해의 인물이 되었으며, RKO 영화사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그에게 영화 연출을 제안하였다.

오손 웰즈는 머큐리 극단을 이끌고 할리우드에 입성하였다. 그리고 그는 영화에 관한 전권을 갖는다는 조건으로 허만 맨키비츠와 공동으로 쓴 시나리오로 '비밀리에' 촬영에 들어갔다.

영화는 거대한 성 제나두에서 신문왕 찰스 포스터 케인이 "장미꽃 봉오리"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죽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에 관한 기록영화가 만들어지는데 아무래도 그 한마디가 걸린다. 그래서 기자 톰슨은 살아 생전 친했던 네 사람을 만나 그에 관한 이야기를 취재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  비밀을 알지 못한다. 그의 마지막 한마디가 어린 시절 썰매에 쓰인 이름인 줄은.  오손 웰즈는 단 한번도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기자를 따라가며 네 사람을 만나 플래시 백 구조로 케인의 주변에 있던 다섯 사람의 눈으로 케인을 본다. 잘 짜여진 19세기 소설의 기승전결 이야기 구조는 무의미한 것이 되고, 그 속에서 같은 사건과 같은 인물은 서로 상이한 진술에 의해 반복과 차이를 경험한다. 그것은 영화에서 이중화법을 통하여 영화적 시간으로 이야기를 다시 배열하고 거기서 생겨나는 모순을 드러내, 질서정연하다고 믿었던 고전적 세계를 비판적으로 다시 성찰하게 만드는 것이다.

오손 웰즈는 시간과 공간의 새로운 만남을 담으면서 촬영감독 그레그 톨란드의 '혁명적인' 도움을 받았다. 그는 초점거리가 깊은 딥 포커스와 정지할 줄 모르는 이동 카메라, 그리고 장시간 촬영과 경사 구도로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공간과 소련 몽타주 기법에서 끌어낸 화면과 사운드의 충돌, 그리고 프랑스  시적 리얼리즘의 미장센을 할리우드의 거대한 기술적 토대 위에서 전적으로 새롭게 배치할 수 있었다. 이것은 영화의 백과사전이며, 전례가 없는 대규모의 실험영화였다.

그러나 당시 언론 재벌이던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는 자신의 스캔들을 소재로 삼았다는 이유에서 이 영화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매장하였다. 영화는 흥행에서 참패하였으며, 오손 웰즈는 평생 그 빚 속에서 헐떡거리며 저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오랜 시간을 기다려 마침내 복권한 <시민 케인>이 모든  영화평론가들의 열광이며 모든 영화감독들의 절망이 되기는 했지만, 오손 웰즈 자신에게는 지옥이었다. <필자: 정성일/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