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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의 지인(知人)이 되기 위한 요건 본문

일상

평생의 지인(知人)이 되기 위한 요건

風林火山 2008.08.14 02:33
요즈음은 퍽이나 새로운 분들을 소개받고 새로운 분들을 만나고 하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날인 듯 하다. 그래서 즐겁다. 요즈음의 내 생활에 있어서 하나를 제외하고는 정말 가장 내 인생을 즐기는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 정도다.

가끔씩 사람들과 얘기를 하다가 이런 질문을 던지곤 한다.

"초등학교 때 절친했던 친구와 아직도 만나니?"

이 질문은 내가 인맥이라는 것을 얘기하던 사람들에게 나는 인맥이라는 것에 대한 거부 반응으로서 했던 질문이었다. 사실 인맥이라고 하는 말이 와전되어 사용되는 것이 잘못이긴 하지만 그것을 와전된 의미 그대로 해석해서 받아들이는 이들이 많다는 것 또한 사실이니까.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동호회 같은 곳에 참석을 하면 항상 헤어질 기약점을 염두에 두고 참석한다. 어떤 때에는 동호회에서 자기 소개를 할 때 이렇게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언제까지 활동할 지는 모르겠지만 활동하는 그 순간만큼은 최선을 다하겠다."

그 때 많은 동호회 사람들이 왜 동호회 활동을 그만두려고 하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기도 했지만 결국 그 동호회 사람들 속에서도 핵심 멤버 몇몇(동호회를 만든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하나 둘 떠나고 물갈이가 된다. 나는 그걸을 이미 알고 얘기를 했던 반면 그들은 그렇게 생각치 않았음에도 그렇게 된 것이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찌보면 시점의 문제고 기간의 문제다. 매일 만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어제는 8시에 헤어졌고 오늘은 7시에 만났다는 것처럼 만남과 헤어짐의 지속적인 반복은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여기서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러한 시점과 기간의 문제가 아니라 지속적인 만남을 전제로 한 평생의 지인(知人)이 되기 위한 요건을 얘기하고 싶은 것이다. 수 년간 만나지 않다가도 다시 만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떤 요건이 있어야 가능한 것인가 라는 부분에서 말이다.

다시 만난다고 해서 우연히 다시 만나고 연락처 주고 받고 또 만나지 않게 되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 어떤 연유에 의해서 헤어진 경우라 하더라도 그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자리라면 만사 제쳐두고 찾아가는 그런 관계를 얘기하는 것이다.


첫번째. 진지한 생각의 공유

이것이 그리 어려운 것인가? 아니다. 전혀. 자신의 고민을 얘기하고 상대가 조언을 한다던지 하는 것은 누구든지 경험해봤을 거 아니겠는가? 그런 진지한 생각의 공유는 서로 간의 유대 관계를 매우 촘촘하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동호회와 같은 경우는 그런 유대 관계를 전제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토록 지속되기는 힘든 것과 같다.

이는 한 회사에서 다른 회사로 이직을 한다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한 회사에 있을 때 아무리 친했다고 한들 회사를 떠나고 나면 바빠서 서로 연락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전화를 하면 어떤 일과 관계되어 부탁할 일이 있어서 하는 경우와 같이 항상 일의 연장선상에서 연락을 한다. 그러다 보니 인맥이 일에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와전되는 것도 크게 이상할 것도 없는 세상이다.

그러나 그런 의미로 인간 관계를 해석하게 되면, 결국 자신이 도움이 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또한 어떠한 도움의 요청에 대한 거절은 인간 관계를 끊는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이들을 평생 알고 지내기는 힘들다. 또한 지독한 자본주의를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에 와전된 의미의 인맥이라는 것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와전된 의미의 인맥이라는 것을 도외시하고 순수한 의미에서의 사람 관계를 애기하고 싶을 뿐이다. 나 또한 인맥의 필요성을 모르는 바도 아니고 최근 들어서는 그것을 충분히 공감하고 있는 것은 나 또한 지독한 자본주의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人間이기 떄문이다.

그 진지한 생각이라는 것이 사람마다 조금씩 양태는 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 없이는 그 사람과의 지속적인 유대 관계가 형성되기는 힘들다. 술 먹는 자리에서 "아 얘들 왜 이리 심각해?"하는 경우도 때에 따라서는 해석을 달리해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해서 그러는 거면 몰라도 항상 그렇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진지함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다.

가끔씩 나를 표현할 때 이런 말을 쓰곤 한다. "무겁지 않고 진지한 사람, 가볍지 않고 편안한 사람" 진지함과 무거움은 다른 것이다. 무거움은 때로는 다른 이들에게 부담이 될 수는 있겠지만 진지함은 결코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다.

비록 나는 남자이긴 하나 술을 그렇게 잘 마시지 못한다. 그래도 이런 저런 진지한 얘기를 할 때는 술 한 병 시켜놓고 조용한 바에서 얘기를 하곤 하지만 예전에는 커피숍에서 커피 한 잔 시켜놓고 밤새도록 떠들던 때도 있었다. 남들이 보면 남자들끼리 무슨 커피숍에서 수다를 떠냐는 얘기를 많이 듣기도 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우리는 진지했고 서로를 더욱더 이해할 수 있었던 때였다.

그것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그런 진지함을 이해할 수가 없는 법이다.


두번째. 바꿀 수 없는 경험의 공유

세상을 살면서 많은 경험을 한다. 그런 경험들을 나 혼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 같이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니까. 그러나 그런 경험들 중에서도 정말 당사자들 사이에는 물질적인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경험인 경우가 있다.

이 말은 래프팅을 같이 한다고 해서 그것이 바꿀 수 없는 경험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꿀 수 없는 경험이라기 보다는 재미있는 경험일 뿐이다. 바꿀 수 없는 경험의 공유의 예를 들어본다면 이런 것이다.

정말 힘들 때 같은 목표로 같이 고생하던 사람들은 아무리 많은 돈을 줘도 다른 데에 스카웃 되지 않는 경우다. 물론 스카웃 되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개인의 선택의 문제이고 그것을 윤리의 잣대로 폄하할 필요는 없다. 개인이 그렇게 선택하는 데에 있어서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분명히 있을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가족 중에 누가 아파서 돈이 필요하다던지, 빚이 많아서 돈이 필요하다던지)

그러나 그런 개인의 선택을 두고 바꿀 수 없는 경험을 공유한 사람이 왜 그런 선택을 하냐고 얘기하는 사람은 그만큼 생각이 짧고 깊이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의 반증이다. 바꿀 수 없는 경험을 공유했기에 그 사람이 떠나는 것 또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진정 평생의 지인(知人)으로서의 자세인 것이다.

가끔씩 지인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곤 한다. "쟤도 욕심이 있는데 평생 그렇게 데리고 다닌다는 것은 그 애를 죽이는 거지 살리는 건 아니잖아? 같이 있어야만 우리 편이다 라는 그런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사람들은 꼭 자기 터울에 있어야만 그것이 우리 편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 같다. 바꿀 수 없는 경험을 공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독한 자본주의를 사는 사람들의 생각 속에는 같이 돈을 벌어야 그것이 우리 편이라는 생각이 있는 듯 하다. 다른 곳에 있어도 다른 일을 하더라도 평생의 지인(知人)은 그런 현상적인 것으로 결정되어지지 않는다.

어찌보면 이런 경험의 공유는 첫번째 얘기했던 진지한 생각의 공유와도 같다고 볼 수 있다. 진지한 생각의 공유의 양태가 사람마다 다르다고 언급했듯이 진지한 생각의 공유의 또다른 양태인 것처럼 말이다. 따지고 보면 그런 진지한 생각의 공유 또한 바꿀 수 없는 경험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둘을 굳이 나눈 것은 사유의 세계가 깊은 사람들은 진지한 생각의 공유만으로도 평생의 지인이 될 수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어떤 계기에 의해 남들과는 공유하지 못하고 그들끼리만 공유한 경험이 평생의 지인으로 연결되는 조건이 되기 때문에 나눈 것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진지한 생각의 공유로 인한 평생의 지인이 오히려 더 쉽다고 본다. 남들과 바꾸지 못할 경험은 사실 어떤 계기를 통해서 경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지한 생각의 공유는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세번째. 서로 간의 노력

아무리 위의 요건이 충족된다고 해도 이것 없이는 평생의 지인이 되기는 힘들 것이라는 것은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다. 어떤 계기를 통해서 서로 돌아설 수도 있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신뢰의 문제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어떤 현상을 보기 보다는 그 이면을 잘 봐야하는데 그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은 것이다.

적어도 평생의 지인이라면 그만큼 그 사람에 대해서 잘 알고 신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원래 이랬던 사람인데 왜 이렇게 됐지?"라는 말보다는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꺼야."라고 얘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잘못했는데도 그게 잘못이 아니라고 얘기하라는 것은 아니다.(물론 잘못이 아니라고 얘기해야할 때도 있지만...)

가끔씩 그런 경험을 한다. 말이나 글로서 표현을 하는 것은 온연한 나의 생각을 100% 반영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냥 즉각적으로 받아들이고 해석한다. 상대가 그것을 모를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모른채 말이다. 큰 그림의 모서리만 긁어대면서 말이다. 그러다 보니 글이나 말로 표현하는 것이 때로는 쉽지 않은 작업인 듯 하다.

그래서 공자는 지식의 極은 無言이라고 했던가? 내가 말을 하는 순간 상대는 내가 의도한 것과 다르게 해석하게 마련이고 그것을 알고 있기에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인가? 이미 말을 하는 순간 그것을 인정하고 해야한다는 것인가? 어쨌든 내 생각을 얘기하고 있음에도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그간 많은 경험을 통해서 그럴 여지가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내가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적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어쨌든 인간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신뢰다. 그런 평생의 지인에게는 지속 가능해야 한다. 그랬을 때 평생을 두고 알고 만나는 관계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한 가지 더 얘기하고 싶은 현상적인 것이 있다. 바로 연락처다.

연락처가 바뀌었는데 연락처를 알려주지 않으면 연락할 방법이 없지 않은가? 사실 이 부분이 내가 가장 모자란 부분이기도 하다. 연락을 잘 하지 않는 편이라서... 연락할 때만 많이 하지 잘 연락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간혹 나와 같은 상대가 있으면 퍽이나 곤란한 상황이 생긴다.

내가 존경하던 지인인 순기형도 미국에 가면서 연락이 끊겼다. 분명 가끔씩 한국 들어올텐데 하면서 아쉬워한다. 평생의 지인이지만 단지 연락처를 모른다는 것 때문에 연락을 못 하고 있다. 예전에는 순기형이 홈페이지라도 있었지만 그것도 없어졌고 말이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것이 바로 개인 홈페이지였다. 8~9년 전에 처음 만든 내 개인 홈페이지의 모토는 이거였다. "언제나 그 자리에." 이따금씩 오는 사람들이 꽤나 있었던 홈페이지였기에 수 년이 지나도 http://lsk.pe.kr 을 치면 항상 거기에 있다는 것을 인지시키려고 했었다. 물론 6개월여 서비스를 안 한 적도 있었지만 다시 오픈하고(블로그로 오픈) 나서는 다시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이 분명 다시 열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겠거니...

항상 그 곳에 가면 내가 있고 내 얘기가 있고 내 삶의 흔적들이 있다는 것. 그런 믿음을 주는 게 나에게는 중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처음 땄던 도메인명을 근 10년 조금 안 되는 동안 바꾸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처음에야 단순히 홈페이지 만들자고 했던 것이었지만 홈페이지(지금은 블로그)를 통해서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경우도 생기고 또 많은 지인들이 이따금씩 방문하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마 홈페이지 시절부터 들어왔던 사람이면 알 듯.

*  *  *

요즈음은 퍽이나 많은 사람들을 그것도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 사람을 만나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인간 관계의 폭이 다양한 류의 인간은 아닌 나지만 이런 저런 활동을 하다 보니 그렇게 된 듯 하다. 그런 다양한 사람들 속에서도 사실 진지한 사람은 만나기가 쉽지가 않다. 그러나 많이 만나야 그 속에서 평생의 지인도 얻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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