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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독서

知에 이르는 길 - 無의 자세 <사카모토 료마> (전3권)

사카모토 료마 1
야마오카 소하치 지음, 이길진 옮김/솔출판사

사카모토 료마 2
야마오카 소하치 지음, 이길진 옮김/솔출판사

사카모토 료마 3
야마오카 소하치 지음, 이길진 옮김/솔출판사


知에 이르는 길 - 無의 자세

야마오카 소하치[fn]1907년 니가타현 코이데마치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야마노우치 쇼조이다. 1938년 시대 소설인 <약속>이 선데이마이니치 대중 문예에 입선했고, 태평양전쟁 중에는 종군작가로서 전선을 전전했다. 전후 17년이라는 세월을 쏟아 부은 대하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공전의 '이에야스붐'을 일으켰다.[/fn]의 '대망'이라는 소설 이외의 또다른 소설 그래서 사실 기대가 남달랐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망'이나 '야망패자'의 감흥은 없었다. 그러나, 나중에 작가가 왜 이 소설을 썼는지를 이해하게 된 것은 바로 배경을 이해하면서 부터였다. 물론 내 생각일 뿐이지만...

사카모토 료마라는 인물은 대단한 인물도 아니다. 그렇게 부각되는 인물도 아닌 역사 속에 묻히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야마오카 소하치가 사카모토 료마라는 책을 통해서 무엇을 전달하려고 했을까? 아무 생각 없이 죽 읽어내려가다가 나중에서야 알게 된 것은 바로 사카모토 료마의 자세라는 점에 있었다.

많은 이들이 '대망'이라는 것이 국수주의적 사고 방식을 가지고 쓴 글이라고 한다. 즉 야마오카 소하치라는 작가가 일본의 제 2 차 세계대전 패망 이후 자국민들의 사기를 고취시키고 일본인의 자긍심을 키우기 위해서 우리 나라에 이런 위대한 인물들이 있었다. 그게 일본이다라는 식으로 쓴 소설이 '대망'이라는 것이다.

허나, 그렇게 애기하는 이들에게 나는 항상 이렇게 얘기한다. 시점을 달리하면 다른 것이 보이는 법이다. 내 나라면 민족주의요 다른 나라면 국수주의인가! 일본을 나 또한 싫어한다. 싫어하는 것과 그렇다고 해서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은 다르다. 있는 그대로 봐야 하는 것이다.

적어도 개인 적인 견해이지만 야마오카 소하치가 '대망'이라는 것이 뜨면서 벌어지는 현상들에 주목을 했었을 듯 싶다. 작가가 원하는 바와 사뭇 달리 너무나도 심하게 '대망'이라는 책을 통해서 벌어지는 분위기가 마치 우리 나라의 '대에~한민국'과 같이 흘렀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읽고 느끼고 도움이 되라고 적은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지나치면 안 되는 법이다.

사카모토 료마라는 인물을 보면, 그는 항상 無의 자세에서 시작했다. 이 말은 당대의 지식인들이라는 작자들이 벌이는 너 이거 아니? 라는 단순한 앎을 가지고 지식이라고 착각을 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無에서 항상 사물을 바라보고 시대를 바라보았다는 점이다.

이 말은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본 세상 그리고 자기가 본 환경 그리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 판단이 지배가 되고 그 테두리 내에서 자기가 보고 싶어하는 것만 보고 자기가 믿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즉 과거로 인해 지금 현재 보는 사물이나 시대를 해석하게 된다는 뜻이다. 물론 역사는 반복되고 역사라는 교과서는 위대하다. 그러나, 자기가 살아온 동안의 과거가 어찌 역사라 할 수 있으며, 자기가 본 것이 어찌 진리만 보아왔을 수 있겠는가?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 왜곡 되고 곡해 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고 판단하기 위해서는 바로 앎이라는 것에 이르기 위해서는 無의 자세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작가가 얘기하고 싶지 않았을까 한다. 자기는 분명 이러 이러한 의도로 얘기를 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곡해하고 이상한 분위기가 흐르게 됨으로서 이건 아니다라는 얘기를 이 소설을 통해서 애기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앎이라는 것은 결국 사람을 속박한다. 우리는 앎으로 인해 더욱더 불행해진다. 알지 못하는 바보는 항상 즐겁다. 허나 이 시대는 앎이라는 것을 요구하는 시대이다. 허나, 이 세상 어떠한 것이든지 치우치면 안 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