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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아들

아들의 유도신문

風林火山 2016.12.05 15:36

#0
내 아들은 유도신문을 잘 한다. 물론 그 또래 수준에서. 어른들이 보면 대번 티가 나긴 하지만 처음 겪어보는 이들과 같은 경우 쉽게 당한다. 

#1
항상 하교할 때 아들은 나한테 전화한다. 늘상 하는 질문들.

아빠 어디야?
저녁은 오늘 어떻게?

#2
근데 오늘은 말이 길다. 뭔 얘기를 하겠거니. 보니까 영화나 보러 가자고 하는 거다. 꼬시는 거다. 사실 내 아들은 나한테 뭐 사달라, 뭐 하고 싶다 그런 요구 하는 적 거의 없다. 뭘 사줘도 그 때 뿐이고 사준 거는 다음 날이 되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소유욕이 없다. 게다가 공부도 잘 못 한다. 하기도 싫어하고. 그래서 안 시킨다. 그래서 여느 아이들과 같이 여러 학원들을 다니고 그런 것도 아니다. 그래서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편인데, 딱 한 가지. 아들은 나다니는 걸 좋아한다. 물론 이 때문에 화려한 전적을 갖고 있기도 하지. 초등학교 3학년 때 나다니면서 집에 안 들어온 적이 십수차례였으니. 뭐 집이고 학교고 난리난 거야 당연. 

아들이 얼마나 황당하게 나가냐면, 수업 2교시 끝나고 나서 화장실 간다 하고 그냥 나가버리는 경우도 있었다니까. 하도 그래서 할머니가 학원 바래다 주는데 학원 간다면서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가서 할머니 가는 거 지켜보고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와서 나가버리는 경우도 있었고. 내가 새벽에 동두천, 용인, 인천 이런 데서 데리고 온 게 여러 번. 이 녀석도 이젠 요령이 생겨서 일단 나가서 놀다가 차 끊기면 주변에 물어서 파출소 간다니까. 헐. 처음에는 그래도 남다른 부분이다 생각해서 남자가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겼고, 계속 그러길래 좋게 타이르기도 했고, 뒤지기 패기도 했는데 답 없더라. 

어느 순간에 지가 깨닫고 나서야 그만두더라고. 뭘 깨달았느냐.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 그래서 언제는 집에 있는 돈 5만원권 4개를 들고 나가서 혼자서 레스토랑 가서 음식을 시켜먹고 했더라고. 초등학교 3학년이 혼자 뭘 시키면 직원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은데, 애가 워낙 당당하니까 그냥 넘어간 듯 싶다. 영수증 보니까 테이블에 1인으로 나와 있던데. 시킨 메뉴를 보면 나랑 같이 다니면서 즐겨 먹던 파스타랑 피자더라는. 여튼 그런 화려한 전적이 보여주듯 나돌아다니는 걸 좋아한다. 내가 나중에 아들이 크면 해외 자주 나다닐 거라고 했던 게 다 이유가 있다니까.

#3
유도신문. 한동안 계속 해외 나갔다가 집에 있으니 나가고 싶은 모양이다. 영화를 보러 가자는 건데, 내가 그랬다.

넌 영화관에 가면 맨날 자잖아.

그러자 그런다.

그렇긴 하지.

그래놓고 가잖다.

#4
공부 못 하고, 운동도 못 한다. 뭔가 특출나게 잘 하는 게 보이지도 않고 오히려 다른 애들보다 못하는 게 훨씬 더 많다. 그런데 별로 걱정 안 한다. 교회 목사님들 왈, 교회에서 가장 행복한 녀석. 그렇다. 얘는 항상 즐겁게 산다. 세상에 걱정이 없다. 어찌보면 뭔가를 갖고 싶다거나 뭔가를 해야겠다거나 그런 게 없어서 그렇다고 볼 수도 있는데, 일장일단이 있다고 본다. 또래들 중에 또리또리한 애들은 말하는 게 어른스럽기도 하던데(어른스러운 애들도 있지만 애가 저렇게 영악스럽다니 하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훨 더 많다.) 우리 애는 그냥 애다. 순진한. 

이제 중학교 올라가는데 이러니 조금은 답답한 부분도 있긴 하지만, 다 살아가게 되어 있다. 내 생각에 이 녀석은 나중에 크면 해외 나가서도 아마 당황하지 않고 잘 대처할 듯 싶은. 근데 뭘로 먹고 살지 궁금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다 수가 생기게 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그리 걱정되지는 않는다. 뭐 돈을 많이 못 벌어도 행복하게 살 수는 있으니까. 적어도 한국 땅에서 쳇바퀴 돌듯 살면서 경쟁하고 집 하나 장만하려고 내 평생을 쏟아붓는 그런 삶은 살게 하지는 않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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