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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영화

이미테이션 게임: 앨런 튜링의 실화를 기반으로 만든 영화, 실화와 다른 점은?


예고편을 보고 이 영화는 봐야된다 싶었다. 내가 좋아할 만한 요소를 두루 갖춘 영화라서. 그래서 개봉일에 봤는데, 예고편이 다가 아니더라고. 예고편을 보면 에니그마 암호해독을 위한 기계를 만드는 앨런 튜링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다는 건 알 수가 있지만, 그 뒷얘기들 즉 크리스토퍼란 기계로 에니그마 해독에 성공한 후의 얘기들은 예고편에 나오지 않는다. 1차 예고편이 떴을 때부터 앨런 튜링에 대해서 뒤적거려서 어느 정도 그의 일화를 몰랐던 건 아니지만 그 외에 제2차 세계대전이 어떻게 끝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비밀(?)이 담겨 있어 흥미로웠다는. 강추하는 바다.


* 아래 내용은 영화와 실화의 차이로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음

* 결론적으로 <이미테이션 게임>은 극적 재미를 위해 사실과 달리 설정된 부분이 다수 있음



암호 해독 기계 이름은 '크리스토퍼'가 아니다



<이미테이션 게임>에 등장하는 독일 에니그마 암호 해독 기계명은 천재수학자 앨런 튜링이 어린 시절 사랑했던 그의 동성 친구 크리스토퍼의 이름을 따온 것으로 설정이 되어 있는데, 이는 영화적인 각색이다. 그런 영화적 각색이 사실 극적 재미를 부여하긴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 앨런 튜링이 만든 에니그마 암호해독 기계명은 봄브(Bombe)다. <이미테이션 게임>에서처럼 전후에 보안을 위해서 폐기되었지만 훗날 복구되었다고.


그러나 앨런 튜링이 학창 시절 크리스토퍼란 친구가 없었던 게 아니다. 실제로 있었다. 실제 인물은 크리스토퍼 모컴(Christopher Morcom). 그러나 <이미테이션 게임>에서처럼 암호학에 관심이 많았던 친구였거나, 앨런 튜링에게 암호학 잘 할 거 같다면서 책을 건네거나 하는 건 영화적 각색이다. 실제로는 둘이서 수학과 화학에 관심이 많았다고. <이미테이션 게임>에서 크리스토퍼 모컴은 폐결핵으로 갑작스럽게 죽는데 이 또한 사실이긴 하지만 둘 사이의 묘한 동성애는 영화적 각색이다.



암호 해독 기계는 앨런 튜링 혼자 만든 게 아니다


당시 영국 지식인들의 집단 캠프인 브레츨리 파크(Bletchley Park)에서 암호해독을 위해 꾸려진 팀원들과 달리 혼자서 독단적으로 암호해독 기계를 만드는 것으로 <이미테이션 게임>에서는 그려진다. 그러나 앨런 튜링이 기초를 설계한 것은 맞지만 봄브(Bombe)라는 기계가 순전히 앨런 튜링만의 힘으로 만들어진 건 아니다. 앨런 튜링이 봄브를 만들기 이전에 폴란드에서 에니그마 암호를 해석하는 기초를 만들었고, 이를 기반으로 1938년에 제작된 기계가 봄바(Bomba)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폴란드에서는 영국에 자신들이 에니그마 암호 해석에 대한 자료들을 건네주었고, 이를 기반으로 앨런 튜링이 제작한 기계가 바로 봄브(Bombe)다. 왜 이름이 봄브인가 하면 기존에 제작된 기계가 봄바(Bomba)였기 때문. 둘 다 폭탄이란 뜻. 이게 1939년이다. 그 이후에도 봄브에 주요한 수정이 가해지는데 이는 앨런 튜링에 의해서가 아니라 또다른 수학자 고든 웰치맨(Gordon Welchman)에 의해서다. 이게 1940년이다. 이 인물은 <이미테이션 게임>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앨런 튜링의 암호 해독 기계는 결정적이었나?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앨런 튜링의 암호해독 기계 때문일까? 앨런 튜링이란 천재 수학자의 업적을 폄하하는 건 결코 아니지만 <이미테이션 게임>에서는 그가 당대에 동성애자라는 거 때문에 인정받지 못하고 비운의 삶을 살았던 거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그의 업적을 돋보이게 했다는 점 또한 분명 있다. 폴란드에서 만든 기계를 상당히 개선시켜 만든 게 앨런 튜링이었고, 앨런 튜링이 만든 기계를 또 개선시킨 데에는 고돈 웰치맨이란 수학자가 있었다. 


이후 미국에서 이를 기반으로 미국 고유의 기계를 만드는데, 이는 기존보다 처리 속도를 대폭 향상시켰다. 미국은 당시 이 기계를 개발하는 데에 200만 달러란 자금을 쏟아부었다는데, 이 기계가 나온 게 1942년이다. 기계명도 똑같다. 봄브(Bombe). 단 앞에 US Navy가 붙는다. US Navy Bombe. 앨런 튜링이 만든 기계에 착안하여 기능적인 부분에서는 동일했지만 처리 속도를 높이기 위해 작동 방식은 전혀 달랐다.


자 그러면 앨런 튜링의 암호 해독 기계가 결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만약 앨런 튜링의 기계가 최초라고 한다면 모르겠지만 앨런 튜링도 그 이전에 폴란드에서 만든 기계를 개선시킨 게 아닌가? 그렇다고 여기서 앨런 튜링의 업적을 깎아내리려고 하는 의도가 있다거나 <이미테이션 게임>이 사실과는 많이 틀리다고 지적하는 게 아니다. 단지 실제로는 이랬다는 걸 얘기할 뿐.



유일한 허구의 인물, 형사 로버트 녹


<이미테이션 게임>에서 유일한 허구의 인물은 로버트 녹이다. 감독의 말에 의하면 자신의 오래 전 룸메이트 이름이 로버트 녹이라는. 로버트 녹이란 형사의 역할은 앨런 튜링에 얽힌 사연을 풀어나가게 하는 역할로 영화 속의 관객의 역할이라고 보면 될 듯. 그 외의 인물들은 다 실존 인물이다. 물론 다 실존 인물이라 하여 <이미테이션 게임> 영화와 똑같다는 건 아니지만 영화 속의 캐릭터 이름이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했다는 거.



조안 클라크는 이미 고용된 수학자였다


<이미테이션 게임>에서 크로스 퍼즐(낱말맞추기 게임)로 고용된 유일한 홍일점 조안 클라크는 영화에서처럼 그렇게 고용되지는 않았다. 캠브리지 대학에서 수학 인재였던 그녀는 일찍이 눈에 띄어 이미 블레츨리 파크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낱말맞추기 게임을 신문에 게재하여 자신의 팀원을 뽑으려 했던 건 실제다. 다음의 퍼즐이 1942년 앨런 튜링이 런던 데일리 텔레그래프에 낸 크로스 퍼즐이다. 12분 이내에 풀어야 일자리를 준다는.



그럼 조안 클라크와 앨런 튜링의 약혼은? 사실이란다. 둘은 육체적인 관계가 없이도 잘 지냈다고. 키스 정도까지는 했었단다. 앨런 튜링이 조안 클라크에게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걸 밝힌 건 프로포즈 후라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앨런 튜링이 감옥에 가는 대신에 선택한 화학적 거세(호르몬 요법) 도중에 조안 클라크가 앨런 튜링을 방문하는데 실제로 전후에 조안 클라크가 앨런 튜링을 방문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소련 스파이, 존 캐언크로스는 팀원이 아니었다


<이미테이션 게임>에서 소련 스파이로 나오는 존 캐언크로스는 브레츨리 파크에서 일했던 건 맞지만 앨런 튜링 팀원은 아니었다. 앨런 튜링과는 일면식도 없는 인물로 <이미테이션 게임>에서는 앨런 튜링의 사적 비밀-동성애자-을 극대화하기 위해 설정된 듯. 게다가 <이미테이션 게임>에서는 처음에 앨런 튜링이 소련 스파이로 몰리는데, 앨런 튜링은 소련 스파이로 오해받아서 조사받은 적이 없다. 참고로 존 캐언크로스(John Cairncross)는 1951년 소련 스파이(더블 에이전트)로 MI5에 의해 적발되었다. 고로 존 캐언크로스와 연관된 <이미테이션 게임>의 내용은 모두 허구란 얘기다. 



불운한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



지금이야 동성애를 문제시 삼지는 않지만 당시 영국에서 동성애는 불법이었다. 앨런 튜링은 19살 난 아놀드 머레이(Arnold Murray)와의 동성애로 인해(원조 교제? 응?) 감옥을 갈 거냐? 아니면 화학적 거세를 할 거냐? 는 선택에서 앨런 튜링은 화학적 거세를 선택했고, 에스트로겐을 주입함으로 인해 생기는 사이드 이펙트(부작용, side effect)로 인해 신체의 변화가 생겨서(예를 들면 가슴이 커진다거나 하는) 자살을 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왜 자살을 하게 되었는지도 명확하지는 않다. 게다가 그게 정말 자살일까 하는 것도 명확하지 않고. 그는 청산가리가 든 사과를 먹고 죽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추측이다. 그의 죽음은 앨런 튜링의 가정부가 발견했는데, 발견 당시 침대에서 누워 있었고, 그 옆에 반쯤 먹다 남은 사과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애플의 로고가 앨런 튜링을 기리기 위해 먹다 남은 사과로 한 게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애플 측에서는 아니라고 부인했다. 


세계 최초의 컴퓨터 하면 에니악(Eniac, 1946)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이건 대학교에서도 컴퓨터의 역사를 배우다 보면 나오는 거고. 그러나 그 이전에 어떠한 발전 과정 없이 에니악이 똻 나온 건 아니라는 거. 디지털 컴퓨터의 시초라고 하면 콜로서스(Colossus)를 언급하는데, 이는 브레츨리 파크에서 1944년에 만든 거다.(1943년에 프로토타입이 개발) 앨런 튜링이 이걸 만들었냐? 그건 아니다. 위키피디아에도 나와 있지만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거 같은데 아니라는. 물론 그가 콜로서스를 고안하는 데에 영향을 준 건 사실이지만 직접적으로 참여해서 만들어진 건 아니라는 거다.



예고편



나의 3,457번째 영화. 개인 평점은 9점.


- 이 글은 스티코 매거진(http://stiblish.co.kr)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