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전반적인 리뷰
2007년 9월 2일 본 나의 2,673번째 영화.
영화 매니아라면 봐야할 영화 100편 45번째 영화.
사실 영화 매니아라면 봐야할 영화 속에 속해 있는 영화들은 좀 어렵다.
그 중에는 대중성을 갖고 있는 영화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이
평론가들이 좋아할 만한 영화들로만 구성이 되어 있는 듯.
그 100편 중에 2편의 한국 영화 중에 하나.
이 영화 정말 특이하다. 이 영화를 보면서 떠올렸던 감독이 바로 김기덕 감독이고,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그러나 이 영화에 비하면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매우 대중성을 갖고 있는 영화다.
그 정도로 이 영화는 독특하다 못해 대중성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영화라는 것.
Buddhism을 좋아하는 나이긴 하지만, 그래도 영화는 감동이나 카타르시스
그 다음에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나의 견해에는 맞지 않는 영화였다.
초반 15분여 동안 거의 대사 나오지 않는다. 거기다 이 영화에 나오는 대사들을
보면 그 한마디 한마디가 뼈가 있는 철학적인 얘기들을 담고 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이런 대사들로만 가득한 영화라는 얘기.
개인적으로 이러한 것을 영화로 만든다면 직설적인 대화로서 그렇게 하기 보다
자연스레 느낄 수 있게끔 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싶다.
그게 아닌 직설적으로 풀어서 얘기를 하는 거라면 영화라는 콘텐츠보다는
책이라는 콘텐츠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 속에서의 대사와 주인공들 간의 대화 그 자체가 맘에 안 든 것은 아니지만
영화로 콘텐츠화하는 데에 있어서는 개인적으로 이런 방식을 선호하지 않는다.
보고 싶은 사람은 보겠지만 개인적으로 추천하지는 않는 영화다.
보는데 힘들었다. ^^
영화 대사 중
정말 내가 느낀 것이 나만 느낀 것일까? 영화 대사 중에서 생각해볼 만한 부분
두 개를 옮겨본다. 보고 무슨 말인지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길.
(이전에 해진이라는 동승(꼬마승려)가 이빨을 뽑았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해진이가 개울물에서 자신의 이빨을 찾는다.
그것을 본 노승이 이렇게 얘기한다.
"떨어져나간 육신의 한 조각이라도 제 것에 속했던 것이라.
애착심이 생기더란 말이지?
길바닥에 나뒹구는 잔돌 한알이
실은 그 이빨 조각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데
생사가 다르지 않고
자타가 둘이 아닌 것과는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해석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는 있겠지만 굳이 하고 싶지는 않다.
그 해석이 옳든 그르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영화 속 대사가 이렇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함에 있으니... 장난을 좀 치자면, "이게 꼬마애한테 할 소린가?" ㅋㅋㅋ
주인공 기봉이 사바세계(쉽게 얘기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자신의 어머니(장님)을 보고 절로 돌아오면서 카메라를 보고 독백으로 하는 얘기다.
티끌 세간에 먼지와 때를 벗고 피 안에 완전함을 갈망하는 마음에서
산객이 되었지만 실은 생애 오탁과 먼지와 쓰레기 심지어 생애 고뇌마저도
사랑하지 않고는 이룰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완전이란 만유를 다 포함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또한 사바세계에 태어나 다양한 인간들과 인연을 맺으면서
갖게 된 과거에 대한 해탈적 측면에서 하는 말인 듯 하다.
이렇듯 이 영화의 대사는 거의 대부분이 이렇다.
한 대사를 듣고 30분 생각하고 하면서 영화를 볼 수는 없을 것인데
매우 철학적이고 관념적인 얘기들이 많다.
이 영화에 대한 평을 읽어봐도 "뭔 말인지 알지?"라는 질문에
나는 솔직히 "뭔 말인지 모르겠다"라는 답변만 내놓을 듯 싶다.
그러나 뼈있는 말들이 너무 많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는...
평론가의 評
정성일 영화평론가의 영화 評이다.
1989년 로카르노 영화제는 세 사람의 신인감독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해 그랑프리는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은표범상은 아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동표범상은 박광수 감독의 <칠수와 만수>에 돌아갔다. 그 뒤 세 감독은 서로의 길을 향해 나아갔다. 아마도 앞으로도 서로의 길이 교차하지는 않을 것 같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만들어낸 배용균은 한국영화 속에서 UFO같은 존재다. 그는 인터뷰하지 않으며, 제도권 영화와도 거의 교류가 없으며, 5년에 한번씩 자신의 영화를 갖고 느닷없이 돌아온다. 그는 앙드레 바쟁의 표현을 빌리면 '완전작가'다. 언제나 감독과 각본, 촬영, 편집, 기획을 그 혼자서 해낸다.
유머라고는 거의 없으며, 형이상학적인 주제와 관념적인 대사들, 그리고 영화에 대한 지나칠 정도의 진지한 믿음은 거의 노이로제처럼 보인다. 바로 이러한 강박관념은 사실은 그의 영화정신이 흔히 알려진 것과는 반대로 신비주의가 아니라 리얼리즘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진심으로 영화가 리얼리즘의 산물이라는 것을 믿는다. 그리고 배용균의 영화적 계보는 로베르토 로셀리니(또는 오즈 야스지로의 일상생활의 리얼리즘과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시적 리얼리즘)에 닿아 있다.
배용균은 (필자와의 매우 개인적인 인터뷰에서) 자신의 영화세계를 '일요일의 리얼리즘'이라고 이름 지었다. 모두들 평일의 리얼리즘을 다룬다면 자신은 모든 규칙이 하루동안 쉬는 세상의 일상생활을 다루고 싶다고 덧붙였다. 이것은 자신의 영화 속에서 그 어떤 다른 변형을 가하지 않으려는 자연의 풍경과 한번도 연기경험이 없는 아마추어 연기자들의 표정 속에서 끌어내려는 마음으로부터 그의 영화가 시작한다는 점에서 정말 그러하다. 그래서 배용균의 영화는 풍경과 표정 사이의 자기성찰로 이루어져 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은 산사에서 수도생활하는 세 사람의 스님에 대한 영화다. 노스님 혜곡은 스스로 자신이 입적을 앞두고 있음을 알고 있다. 젊은 스님 기봉은 사바세계에 두고 온 눈 먼 어머니가 주는 번민으로 괴로워하면서도 도를 깨치기를 갈망한다. 동자승 해진은 고아로 태어나 산사에서 자라난다. 그는 어머니의 얼굴을 알지 못한다. 혜곡 스님이 이 세상을 떠나자 거기서 얻은 작은 깨달음을 안고 두 사람은 서로의 길을 간다. 그리고 영화의 제목은 화두로 남는다. 계속 질문하고, 의심하고, 대답하고, 번민하고, 그리고 다시 질문하는 독백과 방백의 화법이 이어지면서 영화 전체는 선문답의 삼천대천세계로 펼쳐진다.
배용균은 우주처럼 펼쳐지는 풍경을 바라본다. 그리고 풍경과 표정 사이에서 번뇌의 입구를 본다. 바로 이 순간 리얼리즘의 찰나찰나에 모더니즘의 형식이 끼어들고, 카메라가 담아내는 광경 속으로 영화의 수사학이 펼쳐진다. 천변만화하는 세상의 표정은 수도자들의 번뇌가 된다. 이것은 세상을 표상하는 것과 자기 성찰 사이의 싸움으로 밀고 나아간다. 그래서 이 한편의 영화는 보이는 것과 말하는 것 사이의 경계의 긴장으로 가득차 있다. 수많은 선화로부터 영향받은 것이 분명한 화면들은 그런 의미에서 번뇌이며, 그가 넘어서려고 하는 차안과 다가서려고 하는 피안의 경계를 타고 물어보는 공과 색의 넘나듦이다.
지나치게 중생으로부터 멀리 있다고? 그러나 잠깐. 여기서 배용균이 대답하지 않지만 그의 질문이 끝난 것은 아니다. 두번째 영화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95년)은 화두에 이은 그의 사바세계의 밤으로의 산책이다. 그는 우리의 세계 속으로 비행하고 있으며, 한국영화는 배용균을 통해서 또 하나의 리얼리즘의 계보를 얻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세번째 영화까지 다시 5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잔인한 일이다.
재미있는 사실들
1. 배용균 감독
당시 대구 효성여대에서 미술을 가르치던 교수로 연출, 시나리오, 제작, 촬영, 조명, 미술, 편집등을 혼자서 다 했단다. 이런 영화는 처음 본 듯 하다. 단편 영화도 아니고, 또 그렇다고 예술성이 없는 영화도 아니고(물론 나는 예술을 모른다. 다만 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이라니 그렇게 표현하는 것일 뿐)
2. Award
1989년 제42회 로카르노 영화제 황금표범상 수상(그랑프리다.) 이 영화제는 스위스 영화협회에서 주관하는 대회로 2편 이내의 신인감독을 대상으로 하는 영화제다. 배용균 감독이 그랑프리를 수상한 해에 박광수 감독이 "칠수와 만수"로 동표범상을 수상하였다.
3. 촬영지
이 영화의 배경이 된 곳은 경북 안동시의 봉정사의 영산암이라고 하는 암자인데 봉정사를 아는 사람들도 영산암을 보지 않을 정도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암자란다. 그도 그럴 것이 계곡을 사이에 두고 봉정사와 떨어져 있기 때문.
봉정사의 특징은 대웅전 앞에 마루가 있다는 점(봉정사가 유일)과 봉정사 극락전은 현재 우리나라 목조건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점이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