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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영화

유 돈 노우 잭: 고통을 받아도 살려둘 것이냐? 차라리 평온하게 죽일 것이냐?


나의 2,964번째 영화. 잭 케보디언이라는 의사의 실화를 바탕으로 안락사란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는 영화지만 몰입도 있는 스토리와 인간이면 누구나 이 영화를 보면서 인간의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한 번쯤은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영화인지라 강추한다. 개인 평점 9점의 추천 영화.

TV 영화기 때문에 스크린에서는 볼 수 없으니 따로 구해서 봐야 하는데 <유 돈 노우 잭>은 안락사에 대해서 어떤 의견이 옳냐는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지는 않지만 잭 케보디언 의사의 설득력 있는 주장을 통해서 좀 더 다채로운 관점에서 안락사를 바라보게 만들어준다. 게다가 잭 케보디언 역을 연기파 배우 알 파치노가 맡아서 더욱 좋았던 영화. 근데 알 파치노 너무 늙었다. T.T


고통 속에 죽을 것인가?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가족 중에 죽을 병에 걸려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이 있고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고 한다면 가족들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옆에서 고통 받는 모습을 보기도 힘들고 본인 스스로도 그러하니 안락사를 시키는 것이 좋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죽는 건 방법이 아니니 희망을 갖고 끝까지 투병해야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안락사를 도와주는 의사 잭 케보디언. 그는 그에게 의뢰하는 수많은 사람들 모두를 안락사시킨 건 아니었다. 여러 상황을 들어보고 스스로 극복 가능한 경우라면 안락사를 도와주는 걸 거절하기도 한다. 영화 내용에 따르면 의뢰자의 97~98%는 거절한다고 한다. 병을 이기려고 하는 노력도 하지 않고 우울증에 걸려서 안락사를 원하는 경우가 그러한 예다.

개인적으로는 잭 케보디언의 주장에 나는 동의한다. 즉 앞에서 언급했듯이 고통 속에 죽을 것이냐? 아니면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할 것이냐?는 이중적 잣대로 모든 상황을 재단하기 보다는 상황에 따라 때로는 고통 속에서 죽더라도 끝까지 투병하는 게 나은 경우가 있고 때로는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게 나은 경우가 있다는 거다.

그런데 문제는 그 판단을 잭 케보디언 즉 한 사람의 판단에 맡길 수 있느냐는 거다. 나는 문제의 핵심은 거기에 있다고 본다. 많은 이들이 생각하듯이 이중적인 잣대 즉 고통 속에서 죽게 하는 게 맞다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하는 게 맞다는 식의 사고 방식(이런 게 다 서구적인 사고방식에 물들어서다.)으로 접근하는 건 바람직 하지 않다고 본다.


인간의 죽음을 한 인간이 결정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서 <유 돈 노우 잭>에서 잭 케보디언이 TV 토크쇼에 나와서 나눈 대화의 일부를 옮긴다.

바바라(인터뷰어): 다른 의사의 견해도 구해야 하지 않나요?
잭: 항상 구해야 하지요. 또 다른 의사의 견해도 구해야 하구요.
바바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시죠?
잭: 예. 안 합니다. 왜냐면 제 분야의 전문의가 아무도 없으니까요.
바바라: 케보디언 당신은 신처럼 행동한다고 얘기하는 이들에게는 어떻게 얘기하실 겁니까?

(이하 잭의 답변)
저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의사가 약을 줄 때는 의사는 신처럼 행동하는 겁니다.
왜냐면 자연 섭리에 개입하는 거니까요.
의사들은 자신을 신이라 생각하죠. 그러면 안 되지만 그렇게들 하고 있잖습니까.
그러나 저는 차라리 그게 낫다고 봅니다.
주식 투자에 관심을 갖는 의사보다는 자기 환자에 관심을 갖는 게 더 나으니까요.

단순히 입장의 차이라고 얘기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잭 케보디언 매우 똑똑하고 줏대가 명확한 사람이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남성상이다. 그러나 이 부분의 대사만 옮겨놓으면 오해할 수도 있으니 그 이전에 나눈 얘기들 즉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회적 관념에 대한 잭 케보디언의 얘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

바바라: 박사님, 솔직히 답해주시죠. 사람들이 박사님을 엽기적이라고 하는 걸 아시나요?
잭: 지나친 감정주의죠. 심장이식이 처음 시도됐을 때에도 그랬었죠.
의사들마저도 그게 잘못된 일로 여겼죠. 신의 뜻에도 자연 섭리에도 위배된다고 말입니다.
엽기적이지 않나요? 가슴을 열어서 심장을 꺼내거나 혈관우회 수술을 하다니요.
에테르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백년동안 에테르가 쓰이고 있지만 과거엔 그렇지 않았죠.
1846년까지는 말이죠. 에테르가 발견된 건 1543년이었는데
1846년까지는 누구나 깨어있는 상태로 수술을 받아야만 했죠.
외과의가 깨어있는 사람의 살을 째고 열었다니까요.
당신은 에테르가 왜 금지였는지 아십니까? 정교 교리 때문이었죠.
어리석은 관념 때문인 겁니다. 전지전능한 신의 뜻으로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관념.

자.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모든 경우의 공통점은 인간을 살리는 데에 초점을 맞춘 것이지만 잭 케보디언은 인간을 죽이는 데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닌가? 바로 이 점 때문에 수많은 견해가 나올 수 밖에 없고 어느 한 편이 될 수 밖에 없는 논제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할 것은 안락사를 바라는 이들은 고통의 연속인 나날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 죽음이라는 시점의 문제인가? 왜냐면 아프지 않다 하더라도 인간은 누구나 죽으니까 말이다. 인간이 자연의 섭리에 개입하여 죽음의 순간을 연장하는 건 괜찮다고 하면서 안락사는 잘못된 거라는 건 인간의 입장에서 유리하게 해석하는 건 아닐까? 그러면서 그들은 자연의 섭리와 신의 뜻을 운운한다. 인간이 만들어낸 섭리와 신이라는 용어가 이런 때만 유리하게 활용되는 듯 하다.

그렇다면 인간은 누구나 자유 의지가 있기에 죽을 수 있는 의지도 있다고 한다면 그건 잘못된 것일까? 자신의 의지대로 죽음을 맞이하기에는 평온한 죽음이 되지 않을 듯 하여 의학의 힘을 빌어 평온한 죽음을 맞이하는 건 잘못된 것일까? 꼭 잭 케보디언의 말이 옳다는 걸 얘기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그의 말의 핵심을 좀 이해해야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안락사와 존엄사


안락사도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고 한다. 잭 케보디언과 같이 약물을 주입하는 적극적 안락사와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는 소극적 안락사. 내가 볼 때는 둘 다 매한가지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 소극적 안락사를 존엄사라 부르기도 하는데 존엄사를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면서 죽을 수 있게 하는 걸 말한다고 한다.

많은 나라에서 안락사를 허용하지 않는다. 허용했다가 다시 금지시킨 나라도 있다. 우리나라와 같은 경우에도 불법이다. 그래서 안락사는 촉탁살인죄나 자살방조죄라는 형법의 틀로 묶어 놓았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자연의 섭리니 신의 뜻보다는 사회적 관념 때문에 그런 면이 강하기도 하고, 허용할 경우에 생길 우려스러운 점 때문에 쉽게 허용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말이다. 안락사로 조작하는 일도 충분히 생길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래서 나는 예전부터 인간의 행동을 법이라는 틀 속에서만 해석을 하려고 하면 참 많은 문제가 생긴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법은 필요하다. 그게 없으면 개판이 될 테니까. 허나 그렇다고 해서 법이란 틀 속에 모든 것을 담아두려고 하는 어리석은 생각도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존 케보디언은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물론 존 케보디언을 한 인간으로 바라봤을 때는 미혼의 노인이기에 감옥에 간다한들 무서울 게 없으니 그렇게 자신있게 행동하고 자신의 주장을 펼쳐보일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의 생각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비록 법이라는 틀 속에서 그의 주장이 꺾이긴 하지만 말이다.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영화였다. 매우 차분하게 전개되는 스토리였지만 몰입도가 있었던 이유는 다루는 무거운 주제를 새롭게 볼 수 있게 만든 잭 케보디언이라는 사람 때문 아니었나 싶다. 위에서 잭 케보디언과 인터뷰한 바바라라는 인물은 바바라 월터스라는 유명한 인터뷰어이자 앵커다.


바바라 월터스와 인터뷰를 할 정도였으니 당시에 존 케보디언이 감내해야할 부분이 참 많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끝까지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대로 주장을 펼쳤고 굽힘이 없는 그를 보면서(그렇다고 그게 고집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존 케보디언이라는 인간에 대해서도 매력을 느꼈다.

영화 리뷰지만 참 무거운 주제를 다룬 영화라 내용도 좀 무거운 편이다. 나는 존 케보디언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의 생각에 동의를 하고 싶다. 그러나 이는 상대가 존 케보디언 정도 깊이로 사고하는 사람이니 그런 것이지 그렇다고 해서 안락사를 동의한다는 것과는 별개다. 그건 동의한다 안 한다가 아니라 상황적 맥락에서 이해해야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게 법제화되기 위해서는 허용한다, 하지 않는다가 되기 때문에 이분법이 되어버린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논의 속에서 제한적 허용을 하되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수많은 관련 법률이 제정되지 않고서는 허용되기가 쉽지 않다고 본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안락사는 허용된다는 걸 주장하는 건 아니지만 허용한다고 하면이란 가정 하에 얘기하자면 그렇다.

어쨌든 꼭 한 번 보기를 바란다.

예고편: Trai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