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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작. 터키의 전제 정치에 항거하는 내용. 82년도 깐느 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 화려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옛날 영화라서 그런지 크나큰 감흥은 없었던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우선적으로 이 작품은 감옥에서 각본을 썼다고 한다. 깐느 영화제 그랑프리 수상과 동시에 터키 당국에서 반국가적인 영화라고 해서 깐느에서 감독을 체포한다.
감독이 나름대로의 의도를 가지고 만들었지만, 영화 자체만 봐서는 그런 의도 외에 터키의 80년대 어려운 상황이나 터키의 가부장적인 보수적인 관습등도 엿보인다. 욜이라는 뜻은 '인생의 항로'라는 뜻이다. 다음은 "영화 매니아라면 봐야할 영화 100편" 에서 욜에 대한 영화 평론을 발췌한 것이다.
일마즈 귀니의 삶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지난했다. 터키의 군사정권 아래서 불온서적을 발표한 죄로, 수배학생을 은닉한 죄로, 그리고 반공주의자 판사를 저격 살해한 혐의로 그는 10년 이상을 감옥에서 보냈다. 60년 첫번째 감옥행은 그의 배우생활의 시작을 갉아 버렸고, 70년대 초 두번째 감옥행은 연출가로서 한창 활동하는 그를 옭아매었다. 그리고 곧이은 18년 형을 받은 세번째 감옥행은 그로 하여금 감독으로서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게 했다. 감옥에서 지속적으로 시나리오를 집필하고는 조연출 혹은 다른 이를 통해 연출하게 하는 작업을 계속한 것이다. 80년 군사정부가 그의 작품을 상영금지시키고 영화작업이 불가능해지자 그는 감옥을 탈출해 스위스로 망명했다. 그리고 <벽>(82년)을 마지막 작품으로 남기고 47살의 나이에 84년 암으로 숨졌다. <욜>도 그가 감옥에서 시나리오를 쓰고 세리프 괴렌을 내세워 원격조정으로 연출한 작품이다. 망명지 스위스에서 그가 직접 편집한 이 영화에 82년 칸의 대상이 주어진 것은 어쩌면 작품 자체보다는 귀니가 생명을 건 영화에 대한 열정 혹은 정치적 폭력과 억압에 맞선 영화의 힘 때문이었을 것이다. 영화는 실제로 귀니가 장기간 수감됐던 감옥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모범수로 일주일의 휴가를 받은 다섯명의 인물에 초점을 두어 터키의 현실을 이야기한다. 고대하던 고향길이었지만 귀휴증을 잃어버려 다시 구치소에, 그것도 그가 있던 곳보다 더욱 자유가 억제된 공간에 갇히는 인물, 짧은 휴가 동안 친척들의 집요한 감시 아래서만 약혼녀와 데이트할 수밖에 없는 청년, 처남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죄로 처와 자식들을 처가에서 내주지 않아 결국은 함께 도망치나 처가로부터 죽음을 당하는 남자, 쿠르트족이란 이유로 밤이면 총성이 그치지 않는 고향에서 형의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인물, 그리고 자신이 없는 동안 간통한 죄로 사슬에 묶인 채 살고 있는 아내를 가문의 명예를 위해 스스로 단죄해야 하는 인물 등이 그들이다. 이들을 통해 본 터키의 현실은 너무도 암담하고 희망없고 처연하기까지 하다. 군인들은 총을 들고 차에 탄 남자들을 수색하고 신분증을 확인하며 민중들은 당연한 듯이 명령에 따른다. 기차 안 화장실에서 부부 사이의 성적 욕구를 해소할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승객들로부터 구타를 당하는 부부의 모습은 말할 수 없이 비참하다. 자신이 단죄해야 할 아내가 오히려 지쳐 죽기를 바라며 허허로운 눈밭을 아들과 함께 걸어가는 사내의 모습도 있다. 또한 가족의 몰살을 피하기 위해 형의 주검을 보고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야 하는, 그리고 형수에게 관습에 따라 형수의 남편이 됐다고 형의 죽음을 말하는 인물도 있다. 이들을 억압하는 것은 현대 터키 속에 남아있는 봉건과 전통과 관습 그리고 군사정권이며 그 억압에서 자유로운 개인이란 영화 어디에도 없다. 아니 자유란 것은 이 터키라는 곳에 부재하는 단어로 보인다. 영화에는 어떤 영웅도 없으며 운명에 순응하는 무기력한 민중들만 있다. 여자들 또한 전통과 관습 그리고 남성의 명분을 위해 존재하는 듯 그저 수동적이다. 영화는 그저 그들을 보여주고 그들의 상황을 묘사한다. 그들의 조건은 정치적 목표의 좌절이나 절망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여자들과의 관계나 소수인종의 상황에서 인물들의 역정이 기인한다. 이런 점에서 <욜>은 네오레알리슴의 새로운 작품 같기도 하다. 인물의 성격보다는 상황의 불가피함이 극을 이끌고, 그에 대한 비판보다는 묘사로 그치면서 열려진 결말로 이끄는 점이 특히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가까운 과거를 엿본 듯한 느낌을 주는 이 영화는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직접적인 묘사는커녕 매춘의 영화를 만들던 시절을 부끄럽게 한다. <필자: 주진숙/영화평론가·중앙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