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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싫어하는 인간 부류의 최하급에 속하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이 영화는 장 뤽 고다르의 최초 장편 영화라고 한다.
그리고 장 뤽 고다르는 "스카페이스"에 대한 찬사로 이 영화를 만들었고,
신문에 난 기사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모든 것을 미루어보고 인간이 생각하는 인지론적 접근으로 파헤치면,
와 스카페이스 욜라 멋있네. 나도 만들어야지
나쁜 놈이 주인공이래도 저렇게 멋있을 수가!!!
신문 기사에서 아이디어를 얻고 이를 영화로 만들었다.
떴다. 그렇게 될 꺼라 생각치 못했는데 떠버렸다.
많은 사람들의 격찬이 쏟아진다. 이유를 모르고 어리벙벙하다.
그냥 남들이 하도 질문해대니까 그래도 있어보이기 위해서 뭔가 말을 만들어낸다.
아닐까? 정말 이런 식으로 진행된 것이 아닐까?
솔직히 나는 좀 이해가 안 간다.
"스카페이스" 재밌다. 이해한다. 악당이 그렇게 멋지게 보여지다니...
마지막 장면 기관총 들고 갈겨대면서 "Mother Fucker"를 외치는 알 파치노.
캬 죽인다. 안다. 나도 봤다. 그래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음... 여기 나오는 주인공은 완전히 인간 쓰레기다.
여자 등쳐먹고 매번 자리 옮길 때 자동차 훔치고
경찰 죽이고 여자네 집에 들락 날락 하면서 도망치고
아무런 걱정도 없고 아무런 인생의 미래도 없다.
오직 담배와 신문만 있으면 그에게는 천국인 게 이 세상이다.
험브리 보가트의 사진을 보면서 나름대로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고
하루종일 입에서는 담배가 끊이지를 않는다.
나도 한 때 헤비스모커여서 줄담배를 피울 때는
성냥이나 라이터를 이용하지 않고 방금 피웠던 담배를 이용한다.
그 장면이 이 영화에서 나온다.
거기다가 폼이란 폼은 다잡는 폼생 폼사에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훑는 버릇이 있다.
무엇을 나타내고자 했는가?
이렇게 살지 마라?
재미있지 않니?
이 사람 멋지지 않니?
그런 영화 없이도 우리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
허나 가슴 깊이 그것을 느끼게 하는 영화는 안 된다.
재미는 어느 정도 있다. 왜냐면 이렇게 사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거의 인생을 포기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인생을 즐겁게 사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허나 그게 멋지거나 부럽지는 않다.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목표나 미래 그리고 비전을 가졌을 때
더 흥이 나고 더 정열적이 되는 것이다.
뭔가에 쫓기고 자신이 잘못된 짓을 한다는 것을 알면서
천하태평이라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고 삶에 대한 의욕이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내용적인 면에서는 전혀 도움이 안 된다.
감동을 주지도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에 여자친구의 배신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런 주인공의 여자친구라서 여자친구의 행동도 돌발적이고 즉흥적인가?
이해할 수가 없다. 요즈음 플롯이나 스토리텔링에 대해서 보고 있는데
이런 것들과는 전혀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근데 대단한 영화라고 격찬한다.
이해할 수가 없다.
이 영화에서 다만 한 가지. 새로운 배우를 알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이 영화의 여주인공인 "진 세버그"다.
오똑한 콧날. 이쁘다. 오래된 영화를 보면 나오는 이쁜 여자들은
대부분 이런 콧날을 가지고 있다. 또한 분위기도 비슷하다.
다 성형 수술을 했남? 어찌 그리 분위기가 그렇지???
사진을 보고 싶으면 다음을 클릭하시라.
http://movie.naver.com/movie/bi/pi/basic.nhn?code=27993
다음은 "영화 매니아가 봐야할 영화 100편"에 있는 이 영화의 평론이다.
제로에서 다시 시작하자. 장 뤼크 고다르의 선언은 '새로운 영화'의 명제가 되었다.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은 고전적 양식을 완성하였고(앨프리드 히치콕, 존 포드, 그리고 장르 영화들), 이탈리안 네오 레알리슴은 부패하기 시작하였고(펠리니, 안토니오니, 비스콘티), 프랑스영화는 문학의 진부한 재각색(르네 클레망, 앙리 조르주 클루조에서 알랭 레네까지)에 사로잡혔다. 영화는 진퇴양난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이제 영화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결별(!)이 필요했다. 장 뤼크 고다르(1930∼)는 바로 이때 수호천사처럼 등장하였다. 프랑스 영화비평지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영화평을 쓰던 고다르는 하워드 혹스와 뮤지컬, 험프리 보가트, 그리고 할리우드 B급 영화의 열렬한 숭배자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와 앙드레 바쟁의 미장센을 변증법적으로 통일시킬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비평가 시절 그가 쓴 '몽타주, 나의 멋진 근심'은 영화감독으로서의 고다르에 대한 예고편이다. 고다르는 8편의 단편영화 수업을 거쳐 그의 <카이에 뒤 시네마> 동료이자 영화감독인 프랑수아 트뤼포의 시나리오 <네 멋대로 해라>로 데뷔했다. 그는 스스로 이 영화를 '오토 플레밍거의 <슬픔이여 안녕>에 대한 속편'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했으며, 또 한편으로 험프리 보가트에게 바치는 연애편지(!)라고 불렀다. 고다르는 <네 멋대로 해라>에서 자신의 영화광적인 영화에 대한 애정으로 영화에 바치는 존경심과 함께 정반대로 모든 영화에 대한 부정을 시도하고 있다. 영화는 마치 B급 갱스터 영화의 멜로드라마처럼 보인다. 주인공 미셸(장 폴 벨몽도)은 별다른 이유없이 차를 훔치고, 여자들을 울리고, 경찰을 총으로 쏘고, 미국에서 온 애인 패트리샤(진 세버그)를 설득해 도망치자고 유혹한다. 그러나 패트리샤는 경찰에 고발하고, 미셸은 거리에서 총에 맞아 쓰러진다. 고다르는 미셸과 함께 59년 파리를 달린다. 알제리가 프랑스 대혁명정신에 근본적 질문을 던지고, 실존주의가 구조주의에 자리를 양보하고, 드골정권이 보수반동주의로 변질하고 있는 파리에서 '새로운 세대'의 공기와 시대정신이 무엇인가를 영화는 영화 스스로 질문한다. 고다르는 영화사상 최초로 '영화에 관한 영화'를 창조해낸 것이다. 그래서 카메라는 스스로의 자의식을 갖고 주인공과 이야기와 작가 사이에서 영화를 향해 질문을 던진다. 주인공은 갑자기 카메라를 향해 말을 걸고, 화면은 점프 컷과 롱 테이크의 수사학으로 영화의 불문율을 차례로 돌파한다. 영화는 지켜야 할 문법을 갖고 있지 않은 담론이며, 고다르는 영화란 '네 멋대로' 만드는 것이라고 선동한다. 고다르는 단호하게 말한다. 영화에서 이론이란 불가능하다고. 그래서 영화에 관한 이론이란 영화(들)뿐이라고 대답한다. 만일 그러하다면 고다르는 여전히 영화로 영화를 말하는 영화평론가인 셈이다. 그는 <네 멋대로 해라>에서 미래의 영화를 발명한 것이며, 고다르를 통해서 영화는 무한히 다양한 상상력의 이미지를 타고 도주하는 복화술사가 되었다. 고다르 이전에 고다르 없고, 고다르 이후에 고다르 없다. 평생 고다르가 싫어했던 미셸 푸코의 찬사다. <필자: 정성일/영화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