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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독서

논란이 많았지만 한 번 읽어보길 바라는 '사라진 비문을 찾아서' Part I

사라진 비문을 찾아서 
김병기 지음/학고재


이 글을 시리즈로 적는 이유는 할 얘기가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하나의 글로 포스팅을 하려다가 적다보니 하루만에 다 적기에는 벅차서 나눠서 올린다. 시리즈는 총 세 편으로 생각하고 있고 각 편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리고 Part III 가 핵심이다. 독서토론에 치열한 논쟁이 되었던 이유, 내가 김병기 교수님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려고 하는 이유는 바로 Part III 에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얘기는 아무리 차분하게 적는다 하더라도 어조가 강할 수 밖에 없음을 미리 밝혀둔다.


도서 선정 이유

이 책을 알게된 것은 내가 월전 서예아카데미에서 이 책의 저자인 김병기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서이다. 김병기 교수님의 열성적인 강의가 재미있기도 했거니와 그 내용이 퍽이나 관심 있었던지라 강의가 끝나고 그 주에 바로 구입을 해버렸다. 그리고 당시 독도 문제가 회자되던 때였기에 독서클럽 인문/사회팀에 토론도서로 제안을 했고 다수결에 의해 이 책이 선정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책을 읽고서 제안한 것이 아니라 읽고 싶어서 제안한 것이다 보니 서예와 전혀 무관한 일반인들이 이 책을 읽으면 재미없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도 했었다. 뭐 책을 재미로 보는 것은 아니긴 하지만 말이다. 책 속에 나오는 많은 서예 관련 그림들이 보이길래 더욱더 그런 우려가 생긴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독서토론을 할 때 느꼈지만 읽어본 이들 모두 다 재밌었다고 한다. 서예 관련 얘기들도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원래 김병기 교수님이 워낙 재밌게 얘기하시는 스토리 텔러시니 그럴 만도 하지만 말이다. 독서클럽 멤버인 후화님은 마치 한국판 다빈치 코드같다는 얘기까지 하셨을 정도였으니 이 책을 제안한 나로서는 다행스러울 따름이다.

사실 이 책을 토론도서로 제안하면서 얘기하고 싶었던 것은 역사라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역사 왜곡에 대한 우리의 자세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러나 정작 독서토론에서 치열한 논쟁이 오고 갈 줄은 사실 생각치도 못했다. 지금까지 독서토론 운영하고 참여하면서 이렇게 목소리 크게 냈던 적은 아직 없었던 듯... ^^

이렇게 얘기했으니 이 리뷰는 길어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껏 쓴 리뷰와는 조금은 성격이 다른 리뷰가 될 것이다. 책 내용에 대한 리뷰라기 보다는 책을 통해서 내가 하고 싶었던 얘기 그리고 토론하면서 논쟁이 되었던 부분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적는 것이 강하기 때문이다.


역사를 바라볼 때 생각해봐야할 부분

우선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서 얘기를 해야할 필요가 있을 듯 싶다. 우선 다음을 읽고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봤으면 한다.

어떤 사건이 벌어졌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누가 기록했다.
기록한 문헌을 후대의 사람들이 해석했다.


1. 문헌에 기록된 것이 사실(Fact)라고 할 수 있을까?

벌어진 사건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을 기록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문헌에 기록된 것이 사실이라고 말을 할 수 있을까? 인간이 아무리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기록한다고 한들 그것은 기록자의 여과과정을 거치게 마련이다.

똑같은 행동을 보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라고 하면 기록하는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그 행동의 어떤 부분을 집중해서 보고 다른 사람은 다른 부분을 집중해서 보게 마련이다. 하물며 수천년, 수백년 전에 기록된 것은 어떠할까?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예전은 지금과 상황이 다르다. 왕정시대였다.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하는 그런 방식이 아니었다는 거다. 왕의 한마디면 어느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절대왕정시대였다. 그렇다면 아무리 있는 그래도를 기록한다고 한들 왕의 한마디면 기록을 바꾸지 못하겠는가? 적어도 있는 그대로의 사실보다는 가감이 분명 존재할 것이라는 얘기만은 꼭 해두고 싶다.

2. 그래서 문헌 비교를 통한 고증이 필요한 법이다.

즉 당대의 여러 문헌들을 비교해보고 어느 것이 좀 더 설득력 있고 타당한 것을 취한다는 것이다. 같은 행동을 보고 기록한 것들을 취합해서 보다 보면 그 행동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위에서 얘기한 해석의 과정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우리가 생각해보고 넘어가야할 것이 있다.

1) 당신이 믿는 문헌은 당신이 고증한 것인가요?
1) 아니면 스승이라고 하는 분이 그렇게 하던가요?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라면 스스로에게 해야할 질문이라고도 생각한다. 나 조차도 그냥 무심코 넘기곤 하는 것들이 상당히 많이 있긴 하지만 논쟁이 되었던 만큼 그리고 나와 입장이 다른 상대가 얘기하는 게 이러한 부분은 생각해 보지 않았던 듯 싶어서 하는 얘기다.

자신이 무엇을 먼저 믿었고 말했는지에 따라 그것을 지키려고 하는 습성이 있다. 이것은 심리학에서도 잘 나와 있는데 그게 전문 용어로 뭔지는 모르겠다. 찾아볼까 하다 귀찮아서 관둔다. 특히나 아득한 옛날 얘기인 역사를 두고 논할 때는 정말 많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당신이 내세우는 문헌은 얼마나 당신의 고증을 통해서 믿을 만하다고 판단한 것인가? 누가 "이게 정석이야" 해서 그걸 믿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내가 존경하는 스승이 "이것은 믿을 만하다"해서 그런 것은 아닌가?

만약 자신이 스스로 고증한 것도 아니고 다른 이의 얘기를 들어서 그런 것이라고 한다면 어차피 나나 당신이나 50보 100보다. 나야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일 뿐이지 역사학도는 아니지만 안다는 사람이 그 정도 수준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결코 아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결국 내가 무엇을 믿느냐의 문제 아닌가 싶다. 그리고 몇몇 관련 얘기들을 봐도 그 짤막한 글 속에서는 내가 취한 입장을 바꿀 정도의 설득력은 없었다. 또한 그러한 글 중에는 이 리뷰의 이후에 내가 공격을 하고 싶은 글도 있다. 아주 짤막하고 강력하게 말이다. 그건 나중에...

2) 만약 지금 전해져오는 문헌들이 사실과 다르다면?

이건 가설이다. 어떤 사건에 대해서 기록된 문헌들이 10개가 있다고 하자. 그리고 그 10개는 각각의 기록자들에 의해서 해석이 부여된 기록들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 3개가 정말 사실에 가깝게 기록이 된 책이라고 하자. 근데 그것이 없어졌다면?

또한 기록 자체가 많이 없다고 한다면 그나마 기록된 문헌을 갖고 얘기를 할 수는 있겠지만 그 문헌이 학계에서 인정되지 않는 문헌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작 사실은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니겠는가?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아무리 있는 문헌을 갖고 해석하는 노력을 기울인다 해도 그것은 사실과 근접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정설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한 번 생각해볼 일이다. 이러한 때에 다수결로 정설을 결정하는 것은 어찌보면 GroupThink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GroupThink가 무슨 뜻인지 모르면 찾아보기 바란다.

Part II 를 읽기 이전에 다음의 글을 참고하기를 바란다. 왜냐면 Part II 에서는 이 글에 대한 생각들을 풀어서 얘기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글은 독서클럽 멤버들이 찾아서 링크된 것을 가져온 것이다.

- "탁본 자료 축적 과학적 접근해야"
- 왜가 신묘년(391)에 건너와 백잔을 파하고 신라 하여 신민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