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는 확률을 계산하지만, 승부사는 천재의 판단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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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논어 1

風林火山 2007.03.02 02:49
도올논어 1
김용옥(도올) 지음/통나무

나는 도올을 존경한다. 도올을 존경한다는 의미는 맹신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적절한 비판을 가지고 수용할 것을 수용하지만 한 시대를 앞서 나간 현인으로서 비판할 것이 있다 하더라도 마음 속으로만 하고 현인으로서 예우를 다 하는 것이다. 난 존경이라는 말을 쓸 때는 항상 나보다 한 분야에서 앞서서 뭔가를 깨우친 사람에게 존경이라는 단어를 쓴다. 도올의 사상이 어떻든지 그가 비판하는 바가 어떻든지 나 또한 도올을 비판하려면 얼마든지 비판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중요한 맥이 아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비판할 때는 Case 적으로 흐르기가 쉽다. 상대의 지식이 충분히 그러한 다른 여러 사항들을 알만하다고 판단이 되면 인정하고 수용할 줄 알아야 한다. Case 적인 비판은 상대가 책내용에서 충분히 알 만하다고 느껴지면 굳이 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그가 주장하는 전체적인 맥락에서 그가 동서양의 철학을 통하여 비교하고 연구한 것을 통해서 나름대로의 해석을 한 것은 같은 시대에 공부를 했다는 사람들로는 할 수 없는 부분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인정해야할 사실이다.

동양 철학만을 공부해서 뭔가를 논하는 것과 동서양을 두루 섭렵하고 뭔가를 논하는 것과 일장 일단이 있지만 아무리 한 분야의 깊이를 더하려고 해도 한계가 있다는 것은 공부를 해 본 사람이면 알 것이다. 시야가 좁아지기 때문이다. 내가 도올을 존경하는 이유는 그만큼의 경지에 올라간 인생의 선배이자 이 시대의 현인으로서의 예우이지 그의 사상 전체를 두고 무조건적인 수용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쨌든 난 도올을 좋아한다. 허나, 맹신하지는 않는다.

다만 한가지 정말 한 분야에서 깊이있게 공부하여 터득한 사람이라면 다른 것과 일맥 상통하는 道의 경지에 이를 것이고 그런 사람들이 도올을 비판한다고 한다면 나도 뭐라 할 말이 없다. 분명 도올을 비판하는 많은 학계 사람들에게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아직 그들에 비해서 지식이 짧기에 이 정도만 읽어도 감지덕지인 나라 존경할 뿐이다. 대부분의 자기계발 서적이 급이 낮아 나는 좋지 않은 시선을 보내지만 베스트셀러이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과 같이 내가 급이 낮아 도올을 좋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도올논어를 읽으라고 하고 싶지는 않다. 관심이 있으면 보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보지 않아도 상관없다. 논어라는 것이 이 시대에 어떤 도움이 되려면 논어 자체보다는 깨달음이 우선이다. 그것이 논어를 통해서 깨닫던지 경험을 통해서 깨닫던지 똑같다는 것이다. 논어를 읽어야만 깨닫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책은 선택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추천하는 바이다.

1.
과거는 알 수가 없다. 바로 어제로 지나가버린 나의 과거도 기실 나의 의식속의 "기억"(Memory)이라고 하는 특수한 작용에 의존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기억이라는 것은 과거의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과거의 총체가 될 수가 없다. 기억은 과거의 체험적 사건의 "선택"이며, 그 선택을 기억해내는 과정에는 이미 상상력이라든가 주관적 판단이라든가 감성적 왜곡이라든가 하는 여러가지 잡스러운 사태들이 개입한다. 기억은 과거의 사실이 아닌, 과거체험의 해석(Interpretation)이다. 기억은 저등동물에서는 발견하기 어렵다. 기억은 의식작용이 고도화된 동물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인간의 기억은 "언어"와 결부된 상징작용의 소산이다. 과거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다. 과거는 선택이며, 해석이며, 상징이다. 더구나 과거의 사실이라고 하는 것이 간접체험의 소산일 때 이러한 문제는 더 말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
도올은 정말 똑똑하다. 난 첫 페이지의 이 글을 읽는 순간 역시라는 탄성과 함께 '어떻게 이렇게 풀어서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감탄,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가져왔던 생각들에 대한 어떤 근거적인 뒷받침을 해주는 말이어서 너무나 가슴에 와 닿았다. 도올논어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왜 이 말에 대해서 가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해석의 자유라는 것은 종교나 어떤 이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비판은 적절해야 한다고 본다.

2.
성경의 비판 1 : P21 ~ P24
성경의 비판 2 : P45 ~ P46

3.
小說이란 본시 "작은 이야기"다. 삶의 자질구레한 이벤트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들을 우리는 大說 아닌 小說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孔子의 세계에는 大說이었다. 그 모두가 小說인 것이다. 그런데 小說이란 본시 픽션과 넌픽션의 구분이 없는 것이다. 픽션과 넌픽션이 모두 인간의 의식의 사태이기 때문에 지나간 과거를 말할 때는 픽션이 넌픽션이 되기도 하고, 넌픽션이 픽션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차피 小說이기 때문에 너무도 小해서 아무렇게나 말해도 되는 說인 것이다. 사마천의 '공자세가'는 孔子에 관하여 최후로 쓰여진 장편 소설이다. 그 이전의 모든 단편소설을 묶어 장편으로 편집한 것이다. 물론 장편소설을 쓰는 가운데 사마천의 케리그마(선포)가 개입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향후의 모든 공자논의의 조형이 되었다. 그것은 최후의 장편소설이며 최초의 장편소설인 것이다.

4.
자기부정(Self-negation)은 성인의 길의 출발이다. 공자는 분명 "성인의 후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성인이란 "무속집안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성인은 곧 "개비"다. 그가 17세때까지 안씨녀의 슬하에서 자라났다면, 외가의 훈도속에서 성장하였다면, 그것은 그가 宋의 적통속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5.
孔子의 삶의 출발은 "죽음"이었다. 죽음의 가치를 어떻게 삶의 가치로 전환하느냐? 내가 살아있다고 하는 바로 그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 죽음의 가치를 삶의 가치로 전환시키는 그 열쇠는 인간 공자에게 있어서 과연 무엇이었나? 그것이 바로 學(배움)이라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學이라는 것은 "미지의 세계로의 열음"이다. 끊임없는 삶을 향한 도전이다. 그것은 끊임없는 새로움의 수용이다.

6.
자로가 말하였다: "학문이라는 것이 도무지 무슨 도움이 될 것이 있는가?"
공자가 말하였다: "임금이 되어서 간해주는 신하가 없으면 실정하게 되고, 선비는 가르쳐주는 친구가 없으면 귀가 멀게 된다. 미친 말을 몰 때는 채찍을 잠시도 놓을 수 없고, 활을 당길 떄는 이미 두 번 다시 당길 수가 없다. 나무는 목수의 먹줄이 닿아야 곧아지고, 사람은 비판을 받아야 비로소 성인이 된다. 배움을 얻고 물음을 중요시하는 사람이 된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나? 仁을 어지럽히고 士를 미워하면 사회와 마찰을 일으켜 감방신세를 면하기 어렵다. 그러니 사나이라면 학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자로가 굴복하지 않고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남산에 푸른 대나무가 있는데 휘어잡지 않아도 스스로 곧고, 그것을 짤라 화살로 쓰면 가죽과녁을 뚫어버린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뭘 또 배울 것이 있겠는가?"
공자가 타이르며 말했다: "그 대나무 밑둥아리를 잘 다듬어 깃털을 달고, 그 앞머리는 쇠촉을 달아 날카롭게 연마한다면, 그 가죽을 뚫는 것이 더 깊지 않겠는가?"
이에 자로가 무릎꿇고 두번 절하였다: "삼가 가르침을 받겠나이다."

7.
해석(Interpretation)은 이해(Understanding)에 도달하려는 노력이다.

8.
배움의 익힘이란 내 몸의 상태애 따라 그 익힘의 형태가 달라질 것이요(身中時), 또 계절의 형태에 따라(年中時), 또 하루 중에서 아침, 점심, 저녁에 따라(日中時) 익힘이 달라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中庸의 가르침이요, 易의 가르침이요, 老子가 "動善時"라 말한 바요, 孟子가 "聖之時"라 한 뜻의 時일 것이다. 때를 잘못 타서 배우고 익히면 그것이 병이 되는 것이다. 孔子는 평생을 통해 때를 맞추어 끊임없이 정진하여 삶의 기쁨을 만끽했다는 뜻이다.

9.
Whereof one cannot speak, thereof one must remain silent.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할 지어다.

10.
천하의 악이 현인을 미워하고 능력있는 자를 질시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없고,
천하의 선이 현인을 좋아하고 선량한 자를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
현인을 현인으로 대접할 줄 모르고 질투하고 시기하는 것이야말로 天下의 大病이라는 것이다.
賢人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공자에게 있어서는 아주 단순한 의미였다. 현인이란 나보다 먼저 깨달은 자이요, 나보다 먼저 배운 자이다. 그러한 현인을 현인으로서 존중할 줄 아는 마음이 곧 "好學"의 출발이다.

11.
배움의 궁극적 목적은 배움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있는 것이다. 배움은 삶이다. 삶이란 곧 賢賢, 事父母, 事君, 與朋友交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관계속에서 있는 힘을 다할 수 있는 자야말로 곧 "배운 자"인 것이다. 학문과 삶이 점점 유리되어 가고 있는 요즈음의 세태에 대한 子夏의 경종의 메시지인 것이다.

12.
"To err is human, to forgive divine"(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람의 일, 그것을 용서하는 것은 신의 일)이라는 것은 시인 알렉산더 포우프의 유명한 말대로 인간은 "허물"을 향한 존재이다. 그러나 그것을 용서하는 것은 神의 사업이 아니다. 용서 그 자체가 나의 실존적 사업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유교는 인간을 신에 떠맡기지 않는다. "잘못"은 결국 "내"가 아는 것이다. 내가 안다면 바로 고쳐야 하는 것이다. 그 "고침"에 "거리낌"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허물을 고치기를 거리끼는 인간, 그것이 바로 小人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의 모습인 것이다. 나의 행위가 나의 존재에 허물됨을 자각하는 순간, 그 허물됨을 고치기를 꺼려한다면 그는 영원히 배움의 길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허물이란 고치면 끝나버리는 것이거늘......

13.
'황금가지'의 저자이며, 영국의 저명한 인류학자인 프레이저경

By religion, then, I understand a propitiation or conciliation of powers superior to man which are believed to direct and control the course of nature and of human life.

종교란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그것은 인간을 초월해 있으면서 인간의 삶과 대자연의 진로를 지배하고 방향짓고 있다고 믿어지는 힘과의 화해며 달램이다.

14.
樂이란 같아짐을 위한 것이요, 禮란 달라짐을 위한 것이다. 같아지면 친해지고, 달라지면 공경하게 된다. 선생과 제자,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 이 모든 관계에서 在하는 禮란 이들 사이의 마땅한 바를 분별키 위함이요, 이들의 다름을 확실케 하고자 함이다. 그러나 인간은 다름과 공경으로만 살 수가 없다. 그러면 인간은 소원해지고 고독해지고 엄숙해지기만 하는 것이다. 바로 음악, 예술이란 이러한 異化의 方向을 同化의 방향으로 전화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곧 和요 同이다. 樂속에선, 우리가 같이 노래부르고 춤추는 가운데선 우리가 하나가 됨을 체험한다. 樂이란 爲同(같아짐을 위한)인 것이다. 禮子는 天地之別이요, 樂者는 天地之和인 것이다. 樂이란 內에서 動하는 것이요, 禮란 外에서 動하는 것이다.

여기 "禮之用, 和爲貴"라 한 말은, 禮는 분별을 위한 것이지만, 禮는 樂과 이원적으로 분립되는 것이 아니요, 궁극적으로 樂이 지향하는 和를 성취하는데 그 쓰임(用)이 있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그래서 先王之道는 이 和를 아름다운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先王之道는 곧 禮의 총칭이다. 그것은 禮의 다른 말인 것이다. 先王之道는 곧 禮의 총칭이다. 그것은 禮의 다른 말인 것이다. 그래서 작고 큰 일들이 모두 이러한 和를 지향하면서 인간세의 문명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和 즉 樂으로써만 아니되는 상황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오직 조화를 위한 조화, 같아짐을 위한 같아짐만을 생각하는 것은 위태롭다는 것이다. 조화(Harmony)는 부조화(Disharmony)의 계기를 아니 가질 수 없고, 和同은 別異의 계기를 아니 가질 수 없다. 즉 和(樂)는 반드시 禮로써 절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禮로써 절제된 때만이 樂(和)는 樂으로서의 기능(用)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禮가 없는 樂은 광란일 뿐이다.

15.
인간의 믿음은 모두 말속에 있는 것이다. 인간의 약속도 결국 "말"이다. 그렇다면 약속이라구 다 약속이냐? 그 약속이 義에 가까운 것이래야, 즉 의로운 것이래야 지킬만 한 것이 아닌가? 인간의 말이란 의로운 것이래야 그 말이 되풀이되어 실천될 수 있는 것이다.

공손함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공손한 사람들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공손한 자일 수록 위선자가 많고 또라이 새끼들이 많을 수도 있다. 공손함도 禮에 가까워야만 비로소 치욕을 멀리할 수 있는 것이다.

16.
어려서부터 나와 같이 큰 또래 아이들은, 지금의 나의 학식을 잘 인정하지 않는다.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선지자는 고향에서 대접받지 못한다는 명구를 푸념처럼 뇌까리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이 진정으로 나의 학식을 인정하는 마음이 우러나오도록, 겸손하고 인내하며 더욱 더 큰 실력을 축적하여 그 가까운 자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진리다.
재검토될 수 없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다.

17.
남이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 것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내가 진정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내면적 가치를 보유하는 있는가를 걱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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