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이후(시울) |
전반적인 리뷰
2007년 8월 5일 읽은 책이다. 이 책의 리뷰를 적으면서 처음 안 사실이 지금 현재 내가 갖고 있는 책의 표지와 지금의 표지가 다르다는 것이다. 뭐 이 책의 발간일이 2004년 1월이긴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에는 이 책이 다루고 있는 것을 보면 기존의 책 표지 자체도 타인의 고통을 드러내는 그림이었기에 이 책에서 얘기하고 있는 바와 약간은 상충되는 부분도 없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바꿨나?
이 책을 알게된 것은 "TV, 책을 말하다" 방청을 하면서였고, 헤밍웨이님이 선택한 책을 돌려보면서 읽게 된 것이다. 사실 내용의 핵심은 이미 TV, 책을 말하다 방청 소감에서 정리를 해둔 터라 중복된 내용은 빼려고 하다 보니 핵심 내용은 방청 소감에서 확인하길 바란다.
글의 힘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책이었다. 잔잔한 글필에서 묻어나오는 냉소적인 시선을 느낄 수 있었던 책이었다. 또한 인문학적인 시선을 느낄 수 있는 책이기도 했다. 시스템적이고 구조적인 사고 방식으로는 이런 시선을 갖기 힘들 듯. 인문학적인 소양을 위해서 한 번쯤 읽어보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적어도 이 책을 읽고 나면 한가지 확실하게 얻는 것이 있다. 사진이라는 것을 대하는 우리의 시선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시선이 책을 읽고 달라질 지 여부야 개인이 동의를 하느냐 마느냐의 여부이긴 하지만 충분히 설득력 있는 얘기들이 많이 있다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다.
최근에도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에서 모언론에서 총살된 시체 사진을 게재하면서 사진을 게재하는 이유를 나름 변명한 것이 있었는데(전형적이고 상투적인 말로 한 변명이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그런 포토저널리즘에 그다지 수긍하기는 힘들 듯 하다. 적어도 나는 수잔 손택이 얘기한 것들에 동의를 하는 바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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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저널리즘의 정당성?
포토저널리즘이라는 것은 전쟁이 한창이었던 1940년대 초에 모습을 드러냈고 사진 작가들이 전쟁의 참혹함을 드러내는 데에 새로운 정당성을 부여했었다고 한다. 사진이라는 것은 뭔가를 증명해 준다고 여겨지는 것은 아무리 부분적이라 할지라도 말이나 손으로 쓴 글, 그림보다 현실적인 기록이기 때문이다. 즉 뭔가를 환기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전 손택의 날카로운 시선은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사진에 관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전혀 융통성이 없는 사람들이 된다고. 사진이 무엇인가를 증명해준다라고 믿어버리기 때문에 말이다. 그리고 역으로 사진이 무엇을 증명해주는가? 라고 묻고 있다. 사진 하나로 우리가 알아야할 모든 것을 대변해주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론 하비브 <죽어 가는 이슬람 여인을 발로 차는 세르비아 민병대원>, 비옐지나, 1992
사진 출처 : <타인의 고통> 책에서
세르비아 의용군을 이끌던 라즈나토비치는 이 사진이 뉴스위크에 게재되자 사진을 찍은 론 하비브의 목에 현상금을 내걸만큼 분노했다고 한다.이 사진에서 땅바닥에 엎드린 여인이 이슬람교도라는 것을 사진만 봐서는 알 수가 없다. 또한 왜 그 여인이 죽은 듯이 엎드려 있는지도 얘기해주지 못한다. 결국 사진이 알려주는 바는 총을 들고 한 손에는 담배를 든 병사가 엎드린 여자를 발로 차려고 한다는 정도이다.(발로 찬다가 아니라 발로 차려고 한다)
카메라의 기능
카메라라는 것은 원래 무엇인가를 미화하려는 것이 기본적인 기능이었다. 그러나 좋지 못한 것들을 보여줘서 추하게 만드는 것은 근래에 등장한 기능이다. 그러나 이 기능은 사람들로 하여금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켜서 뭔가를 고발하려고 하는 사진들은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 만큼 충분히 충격적이어야만 했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최근 우리나라에서 보건복지부의 금연 공익 광고를 보면 알 수 있는 부분이다.(물론 포토-사진-은 아니지만) 책에서도 금연에 대한 사례를 제시하고 있는데 자극적인 사진들을 담배에 삽입하여 담배를 태우는 사람들이 그 사진을 보고 금연을 하게끔 한다는 사례를 들고 있었다. 그런 사진을 실을 경우 단순한 경고문구보다 금연을 할 가능성이 60배나 높아진다고 한다.
이에 수잔 손택은 이렇게 얘기한다. 매우 날카로운 지적이다. 도대체 얼마나 이런 충격이 무한정 지속되겠느냐는 것이다. 충격은 익숙해지기 마련이고 사람은 자신에게 달갑지 않은 정보에 스스로를 방어하는 수단을 갖게 되기 때문에 금방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이런 생각을 해본다. 이 책에서 얘기하는 것도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정도로 설득력이 있겠지만 그 약발이 얼마나 가겠느냐? 이런 비평적 시각으로 의식 고취는 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sustainable 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는... 그것은 그만큼 다양성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인간 세상이기에...
사진은 선택적 기억
사진은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 이점이 없는 유일한 주류 예술이다. 그 이유 중에 하나는 우연이라는 것이 사진 촬영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곳에 그 장면은 그곳에 있어야만 촬영 가능하다는 사실에서 충분히 생각해볼 수 있는 얘기다.
이런 사진들 중에서 오늘날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특정 사회가 한번쯤 생각해보자고 선택해 놓은 것이다. 이러한 기억은 재현될 수가 없는 허구다. 집단적 기억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도올이 얘기한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도올의 얘기는 다음과 같다.
인간의 기억은 "언어"와 결부된 상징작용의 소산이다. 과거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다. 과거는 선택이며, 해석이며, 상징이다.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특정 사회가 한번쯤 생각해보자고 선택한 집단적 기억이라고 부르는 것은 일종의 약정이며 "이것은 중요한 일이야"라고 우리 정신에 챙겨두는 것을 말한다. 다만 집단적 교훈만 있을 뿐이다.
인간의 이중성
린치를 당한 흑인들의 사진을 보는 것은 의무라고 하면서 미국이 벌인 전쟁(베트남전등)에서 희생된 민간인들의 사진을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은 잘못 되었다면서 올바른 정신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엄청난 문제라고 수전 손택은 지적한다. 역시나 의식있는 미국 지식인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스펙터클이 되어버린 폭력의 소비자들이며 전쟁터에서 위험을 무릅써보지 않고서 그 참상을 세세히 말하는 데 정통한 사람들이다. 위험에서 멀리 떨어져 의자에 앉은 채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주장하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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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를 옮기는 경우는 처음인 듯 한데, 읽어볼 만한 부분이 많아서 옮겨둔다.
출판사 리뷰
오늘날 타인의 고통을 염려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지난 2003년 10월 12일 독일출판협회는 제55회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서 수전 손택에게 평화상을 수여했다. "거짓 이미지와 뒤틀린 진실로 둘러싸인 세계에서 사상의 자유를 굳건히 수호해 왔다"는 것이 시상 이유였다. 독일출판협회가 잘 지적했듯이, 손택은 첫 저서 {해석에 반대한다}(1966)에서부터 최근작 {강조해야 할 것}(2002)에 이르기까지 기계로 대량 복제되는 이미지가 한 문화의 감수성을 어떻게 바꿔놓는지 다양한 방식으로 일관되게 추적해 왔다. 그리고 미군의 폭격기들이 한창 바그다드 외곽 지역을 폭격하고 있던 지난 3월 말에 출판된 이 책 {타인의 고통}은 그 노력의 결정판이다.
손택의 관찰에 따르면, 오늘날의 현대 사회는 사방팔방이 폭력이나 잔혹함을 보여주는 이미지들로 뒤덮여 있다. 특히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사람들이 텔레비전, 컴퓨터, PDA 등의 작은 화면 앞에 붙박인 채로도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재앙의 이미지를 속속들이 볼 수 있게 해줬다. 그렇지만 이 말이 곧 "타인들의 괴로움을 생각해볼 수 있는 사람들의 능력이 두드러질 만큼 더 커졌다는 말은 아니다." 이미지 과잉의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을 스펙터클로 소비해 버린다. 그리고 이렇듯 타인의 고통이 '하룻밤의 진부한 유흥거리'가 된다면, 사람들은 타인이 겪었던 것 같은 고통을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도 그 참상에 정통해지고, 진지해질 수 있는 가능성마저 비웃게 된다는 것이 손택의 지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손택은 우리에게 이런 제안을 던진다. 무엇보다 먼저 이 세계를 거짓된 이미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자고, 제 아무리 이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제스처가 엿보일지라도 세계를 재현하는 이미지의 방식 자체를 문제삼아 보자고. 따라서, 자신이 예전에 '투명성 Transparency'이라고 불렀던(『해석에 반대한다』) 이런 태도를 가지고 손택은 우리가 이미지를 통해서 본 '재현된' 현실과 '실제' 현실의 참담함 사이에 얼마나 크나큰 거리가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보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책을 쓰고 있을 때 손택은 이런 궁금증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시청자들은 잔인하게 묘사된 폭력에 익숙해져 버린 걸까? 매일같이 쏟아지는 이런 이미지 때문에 현실 인식이 손상된 걸까?" 손택은 스스로 이런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 고통의 재현물, 예컨대 전쟁이나 참화를 찍은 사진들을 볼 때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취해 왔는지 분석해 본다. 손택의 지적에 따르면, "고통을 둘러싼 도상학은 기나긴 족보를 갖고 있다." 특히 재현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고 간주되는 고통은 신이나 인간의 분노가 낳은 것이라고 이해되는 고통이었다. 이런 고통의 재현물(예컨대 고문당하는 순교자나 박해받는 예수)은 뭔가 교훈을 주거나 본보기를 보이려는 의도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고통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격렬한 것"이었고, 이런 욕망은 얼마 안가 "사람들은 원래 소름끼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경향을 타고났다"는 주장으로 이어지기에 이르렀다.
"'끔찍함 terribilit' 속에 매력적인 아름다움이 놓여 있다" "숭고하거나 장엄하며, 그도 아니면 비극적인 형태로 아름다움을 담고 있으니, 유혈 낭자한 전투 장면도 아름다울 수 있다" 등등의 주장이 나오게 된 것도 바로 이런 욕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런 사고방식 안에서는 고통의 재현물이 더 이상 교훈이나 본보기 구실을 하지 못한다. 단지 "병적일 만큼 음란한 정신 상태"의 시각적 등가물이 될 뿐. 현대에 들어와 극한의 상태에서 발생한 현실의 고통을 담은 이미지가 일종의 '포르노그라피'가 되어버리고, 이런 이미지를 보는 행위가 (의도했든 안 했든) 일종의 관음증이 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더군다나, 날이면 날마다 끊임없이 폭력의 이미지가 쏟아져 나오는 현대 사회에 들어와 이미지의 성격 자체는 사람들의 "신경을 거슬리고, 소란을 불러 일으켜야 하며,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드는 쪽으로 뒤바뀌어 버렸다. "쉴새없이 이미지가 자신을 드러내는 상황, 한줌의 이미지들이 반복해서 자신을 과잉 노출하는 이 상황을 그밖에 다른 어떤 방법으로 돌파할 수 있겠는가?"라고 손택은 반문한다. 이렇듯 이미지 자체가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갈수록 자극적인 요소들을 요구하게 되면 이미지들은 타인의 고통을 재료로 사용할 수밖에 없으며, 그에 따라 타인의 고통은 "소비를 자극하는 주된 요소이자 가치의 원천"이 된다. 바야흐로 오늘날의 문화에서는 이미지가 스펙터클이 되어버린 셈이다.
손택은 프랑스의 철학자 베이유와 영국의 소설가 울프를 좇아서 이렇게 얘기한다. "폭력을 당하게 되면 그 사람은 숨을 쉬는 생생한 인간에서 사물로 변형되어 버린다"고, 즉 "인간을 하나의 개인으로서, 인류로서 구별케 해줄 수 있는 바가 잔인하게 파괴되어 버린다"고. 이 말은 타인의 고통을 담은 이미지에도 들어맞는다. 타인의 고통을 보여주는 어마어마한 양의 이미지가 쏟아지면 사람들은 이런 고통 자체에 점점 더 무감각해진다. "한번 충격을 줬다가 이내 분노를 일으키게 만드는 종류의 이미지가 넘쳐날수록, 우리는 반응 능력을 잃어가게 된다. 연민이 극한에 다다르면 결국 무감각에 빠지기 마련"인 것이다.
따라서 손택은 이렇게 주장한다. 연민은 쉽사리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우리가 저지른 일이 아니다")까지 증명해 주는 알리바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보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오히려 그런 고통을 쳐다볼 수 있는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나 잔혹한 이미지를 보고 가지게 된 두려움을 극복해 우리의 무감각함을 떨쳐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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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문제 제기를 하고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고 있지만 So What? 그래서 이러한 사진들을 게재하지 말아야 하는가? 어떤 때에 그것에 가치를 두고 기록으로 남겨야 하는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런 관점에서 적은 책이 아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책이다. 나 또한 너무 시스템적인 사고의 한계를 드러내는 듯.
작금의 현상들에 잘못된 부분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과 함께 새로운 시각을 던지고 있다는 점은 높이 살 만하다. 많은 사진들과 함께 인문학적인 얘기 진행이 자칫 이런 책의 재미를 떨어뜨릴 수도 있을 지 모르겠지만 이런 책도 읽어야 생각의 폭이나 깊이가 달라질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의 리뷰를 적고 나서 여러 다른 리뷰를 보면서 느끼는 것이 역시나 나는 너무 시스템적인 사고를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핵심이 뭔데? 그래서 어쩌라고? 아직 나는 많이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재밌는 리뷰가 많다. 이 책에 대한 리뷰는 특히나 말이다. 인문학적 견해의 리뷰가 많은 것은 그만큼 수잔 손택에 대한 팬들이 인문학도들이 많아서일지도 모르겠다. 많은 생각이 드는데 별로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 글이 길어진다. 이 책에 관심이 있다면 읽고서 다른 이들의 리뷰를 읽는 것도 상당히 도움이 될 듯 하다.
- Photojournalism(포토저널리즘)과 Visual Communication(비주얼 커뮤니케이션)
- 쌤통 심리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나온 사진들 중에서 가장 잔인한 사진을 올린다. 선택적으로 보게 하기 위함이니 아래를 클릭한 사람만 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