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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독서

삼국지 vs 대망에 대한 덧글의 답변 III

작가의 스타일

나관중과 소하치는 분명 글쓰는 스타일이 다릅니다. 그래서 나관중은 역사적 고증보다는 재미 내지는 대중성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소하치는 사실성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이런 작가관에 글쓴이께서는 소하치의 우세승을 주신 것에 대해서 저는 '나관중의 작가관에 우세승을 주고 싶습니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

(잠깐 언급을 하자면 대망에서 주인공이 오다, 도요토미, 도쿠가와 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이런 유명한 인물들 보다는 우리나라에 덜 알려진 다케다 신겐 이라던가 켄신과 같은 사람들에 주목한 것입니다. 마치 삼국지에서 제갈량, 사마의와 같이 익숙한 인물들이 삼국지의 주된 이야기를 끌어가지만 그 와중에 등장하는 왕평, 등애와 같은 사람들을 좋아하는 것처럼 말이죠. 이 부분을 가지고 대망을 완독하셨은지 궁금합니다. 라고 말씀하시니 저로서는 좀 씁쓸하네요)

4. 글쓴이께서 제기하신 질문들

1) 글쓴이의 초점이 다르다고 표현한 부분은 나관중과 소하치의 소설이 보이는 경향성을 의미합니다. 나관중은 철저한 역사적 고증보다는 야사 내지는 흥미위주의 소설을 적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나관중의 삼국지는 수호지/서유기와 같은 반열에 들고 있지요. 소하치의 소설이 가지는 경향성 내지는 특징은 앞서 글쓴이께서 설명해 주셨으니 이 부부은 제외하겠습니다.

2) 스타일이 다르다는 것은 문체가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소하치의 소설에서 보이는 문체가 있을 것이고, 나관중의 소설에서 보이는 문체가 다를 것입니다.

일단 위에서 초록색으로 배경색을 한 부분을 보면 무엇을 스타일이라고 말씀하시는 지 잘 모르겠습니다. 위와 아래는 합쳐보면 이렇게 됩니다.

문체가 다른 스타일을 가진 두 사람이기에 나관중은 역사적 고증에 초점을 맞추었고 소하치는 사실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런 작가관에 저는 소하치에 우세승은 준 것이다.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초점에 대한 답변이 있기 때문입니다. 분홍색의 배경색을 한 부분이 그렇습니다. 초점은 경향성이다라고 하셨는데, 경향성이 무엇인지 이해가 안 갔습니다. 뒷부분을 보면 역사적 고증보다는 야사 내지는 흥미 위주의 소설을 적은 것이라는 것이라고 되어 있으니 이런 것이 경향성이라고 생각하시는 듯 보입니다.

제가 이 질문을 드렸던 이유가 있습니다. 용어의 사용에 있어서 나름대로의 기준을 갖고 얘기를 하시는지를 알기 위함이었고, 제가 생각할 때 님의 용어에는 그 사용 기준이 조금은 애매모호한 부분이 있어서 그랬습니다. 이는 저에게 논리적인 비약이라고 얘기를 하셨던 부분에서 비약에 대한 용어의 정의를 잘못 아신 부분을 제가 지적하면서 용어에 대한 이해도가 어느 정도인지 알기 위함이었다는 것과도 맥락이 같습니다.

위에서 보이는 부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스타일은 문체다.
2. 스타일이 달라 나관중은 대중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3. 초점은 경향성이다.

허나 실상 말씀하시는 문체랑 초점은 연결짓기가 곤란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문체 즉 작가의 스타일은 작가가 쓰는 글의 개성입니다. 어떤 이는 시적인 표현으로 아름답게 글을 적는 사람이 있고, 어떤 이는 사실적 묘사를 매우 잘 하는 사람이 있듯이 말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제가 여기서 수사학을 언급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해시키는 것에 목적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말씀하신 초점은 제가 볼 때 작가관입니다. 이는 제가 맨 처음에 <삼국지>와 <대망>을 비교했을 때, '나관중과 야마오카 소하치'를 비교할 때 다루었던 핵심인 작가관입니다. 그런데 저는 문체를 두고는 뭐라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작가의 의도와 작가관을 처음에 얘기를 했지요. 문체는 사실 무엇이 더 낫다라고 판단할 수가 없는 문제입니다.

어떤 문체를 선호하느냐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인지라 그것을 두고 뭐라 할 수는 없는 부분이지요. 그러나 역사소설을 쓰는 작가관은 얘기가 다릅니다. 나름 둘 다 의도는 있었지요. 첫 글의 '군국주의 vs 중화주의'에서 말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배제를 하고 작가관을 보면 중화주의를 강조하기 위해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해서라도 쓰겠다는 입장과 군국주의를 강조하기 위함이지만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지 않고 철저한 고증을 통해서 하겠다는 것과는 엄연히 다른 겁니다.

그리고 이런 문제는 뒤에서 더 다루겠습니다. 왜 제가 야마오카 소하치에게 우세승을 주게 되었는지는 비단 <삼국지>와 <대망>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부분에서 다음 부분에 대해서는 제 답변은 아래와 같습니다.

(잠깐 언급을 하자면 대망에서 주인공이 오다, 도요토미, 도쿠가와 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이런 유명한 인물들 보다는 우리나라에 덜 알려진 다케다 신겐 이라던가 켄신과 같은 사람들에 주목한 것입니다. 마치 삼국지에서 제갈량, 사마의와 같이 익숙한 인물들이 삼국지의 주된 이야기를 끌어가지만 그 와중에 등장하는 왕평, 등애와 같은 사람들을 좋아하는 것처럼 말이죠. 이 부분을 가지고 대망을 완독하셨은지 궁금합니다. 라고 말씀하시니 저로서는 좀 씁쓸하네요)

이는 제가 <삼국지>의 대표성을 들고서 이문열의 <삼국지>를 이미지로 하고 아래 부분에서 '이문열 vs 김훈'을 비교한 것을 보면서 다른 평역본들과 함께 비교를 해야한다고 지적하시던 것과 매한가지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볼 수 있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하기에 대망을 완독하셨는지 궁금하다는 말도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럼 직접 물어보겠습니다. 완독하셨습니까? 그럼 <대망>에서 비중있게 다루지 않은 장수들 중에서 좋아하는 장수가 누구인지요? 다케다 신겐이나 우에스키 겐신은 삼국지에서 유비, 조조, 손권과 동격적인 인물이기에 드리는 질문입니다. 님께서는 유명한 인물들보다 덜 알려진 인물에 주목하신다고 하셔서 그런 겁니다.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키 겐신은 <대망>에서는 비중있게 다루지 않았지만 유명한 인물에 속합니다. <대망>에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는 말입니다.


용어의 사용

추가적인 질문1) 제가 고등학교를 다녔을 당시 '임진록'과 같은 소설들을 교과서에는 '병자호란으로 인한 울분을 토로한 작품이다'라고 평가하였습니다. 일종의 대리만족을 소설을 통해 느꼈던 것이죠. 삼국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삼국지 자체가 그렇습니다. 남송시대 주희는 위/촉/오 삼국의 정윤논쟁에 깊숙히 개입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남송이 북방 이민족에 밀려 남쪽으로 도피해있었던 역사적 맥락과 무관하지 않죠. 남송의 주희가 지식인들간의 치열한'정윤논쟁'을 통해 촉나라의 정통성을 인정하였다면 나관중의 삼국지는 서민들에게 그 특유의 필체를 통해 서민들에게 어필하였던 것입니다. 매일같이 조조에게 쫓겨다니며 방랑생활을 하던 유비가 한중전투에서 조조의 대군을 격파한 장면은 분명 독자층에서 통쾌함을 주기에 충분한 장면이었습니다. 제갈량이 번번히 사마의의 대군과의 접전에서 승리하였던 장면 역시 그러하구요. 남송시대 주희서부터 원나라 말기, 명나라 초기까지 수호지/삼국지와 같은 소설이 등장하고 그보다 앞서 지식인간의 정윤논쟁이 일었던 것은 그만큼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지식인이던 서민층이던)에게 공감을 불어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점을 '서민층에게 큰 웃음을 주었다'고 표현한 것에 불과하지요.

추가적인 질문2) '문제의식'이라는 단어는 아마도 제가 오해의 소지를 불러일으킬만한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글쓴이께서 대망을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고 표현하셨는데 저는 이 부분을 '문제의식'이라는 잘 못된 표현을 적은 듯 하네요 오해가 있으셨다며 죄송합니다.

서민층에게 큰 웃음이라는 것이 무슨 말인지 잘 알겠습니다. 제가 이 질문을 드리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큰 웃음이라는 것은 '의식이 고무되었다'는 것으로 이해를 했는데 문제의식이라는 용어를 보고 왜 문제의식이라고 표현을 했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둘 다 시대적 배경을 중요시한다고 한다면(이것은 님이 강조한 부분이지요.) 둘 다 의식이 고무되었다고 하면 되는데 하나는 웃음을 주었다고 하고 다른 하나는 문제의식이라 표현을 해서 그런 것입니다.

즉 제가 위에서도 지적했듯이 용어를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저는 이해가 달라진다는 겁니다. 만약 같은 의미로 얘기를 했다면 같은 용어를 써야 제가 아 이게 이것과 같은 의미겠구나 하고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많은 생각이 든다고 해서 그것이 문제의식과 동격이 될 수는 없습니다. 문제의식이라고 표현이 될 만한 것은 <삼국지>에서 허구적으로 기술된 부분을 어떻게 봐야하는가 하는 그런 부분이 문제의식이라고 표현되어야 적절한 용어의 사용이라 하겠습니다.


객관과 일반

글쓴이께서는 '일본에서 수학을 잘하는 사람이랑 중국에서 수학을 잘하는 사람이랑 비교를 할 수가 없는 거군요' 라는 비유를 들으셨는데, 이는 잘못된 비유입니다. 어찌 문학과 수학이 같을 수 있는 것인가요? 수학은 그 엄밀하고 치밀한 증명이 필요하고 공리와 정리를 사용한 풀이과정이라는 객관적인 기준잣대가 있습니다. 하지만 문학이라는 장르에서 그런 객관적인 기준잣대가 있을까요? 저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수학이 아니라 다른 것을 예로 들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 아쉬움이 남기는 합니다. 저는 문화가 다른 나라에서 쓰여졌다고 비교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 예를 들었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수학이라고 해서 객관적인 잣대가 성립이 되고 문학이라고 해서 객관적인 잣대가 성립이 안 된다는 말에는 동의하기 힘듭니다.

이미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답변을 드리면서 명시된 부분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다음입니다.

그런데 수학 시험과 같은 경우에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한 번 쳐서 점수가 낮다 해서 그것을 일반화시킬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러면 몇 번의 시험을 쳐야 그 둘을 제대로 비교할 수 있느냐는 생각을 도출하게 되지요.

님께서는 한 번의 시험으로 비교가 가능하다고 얘기를 하시는 듯 하지만 계속해서 문제는 생깁니다. 객관성이라는 것을 누가 이게 객관성이다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을까요? 3번을 봐야 객관성이 확립이 되나요? 10번을 봐야 확립이 되나요?

한 번의 시험으로 어떤 결과를 보면 그것은 객관성이 있다라고 얘기할 수 있겠지요? 마찬가지로 비교 기준이 같으면 그것의 결과에 대해서는 문학도 비교가 가능한 것입니다. 같은 역사소설이고 자국민의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의도로 적어진 두 편의 역사소설이지만 작가관이 다르고 치중한 부분이 다르고 전반적인 내용에서 보이는 면이 다릅니다.

그러면 치중한 부분이 어디 어디라고 각 책을 온연히 펼쳐두고 비교해야 객관성이 확립이 될까요? 객관이라는 용어를 저는 제 글에서 써본 적이 없는데(적어도 <삼국지>와 <대망>의 비교글에서 말입니다.) 님께서 계속 객관이라는 것을 언급하시니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그렇게 몇 %로 정확히 수치화 하면 객관성이 확립이 되느냐는 겁니다.

그래도 문제 생기잖습니까? 이 표현이 어떻게 그렇게 볼 수 있느냐는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지요. 결국 그래서 저는 제 글에서 표현을 어떻게 했습니까? 위에 굵은 글씨체로 표현했지요. 일반화. 즉 제 기준은 일반적인 기준입니다. 객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지요. 결국 이 또한 용어에서 기인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수학이 문학보다 좀 더 객관적이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동의하기에 다른 예를 들 껄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래도 이런 계기를 통해서 생각할 수 있는 꺼리를 드렸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봅니다. 용어의 선택 문제라든지 내가 믿고 있는 객관이라는 것에 대해서 좀 더 큰 시야를 갖고 볼 수 있으면 된 것이지요.


대중성과 파급력

그리고 동일한 시험문제를 주어서 평가를 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서는 글쓴이께서 전편의 글에서 제시하신 기준이라는 것이 다분히 대망의 장점들에 치우진 판단을 하셨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오히려 반대로 제가 '소설이 대중들에게 미치는 파급력'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대망과 삼국지를 비교했더라면 당연히 삼국지의 손을 들어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분히 글쓴이의 판단들은 그저 글쓴이의 취향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주관적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구요. 이러한 기준들이 명확하긴 하지만 글쓴이의 판단은 다분히 대망을 옹호하는 입장입니다. 이 점에 있어 저는 '삼국지'를 옹호하는 것일 뿐이구요. 객관적인 기준잣대가 아닌 주관적인 기준잣대로 대망이 우월하다 삼국지가 우월하다 따질 수 없는 문제입니다

대중들에게 미치는 파급력이라는 것을 대중성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런 대중성 때문에 저는 지적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렇게 얘기를 드려보겠습니다.

1) 어떤 청소년이 아니면 어떤 사람이 <삼국지>가 유명하다고 해서 우리 나라에서 제일 많이 보는 이문열의 <삼국지>를 봤습니다. 유비와 조조 중에 누구를 선이라고 생각할까요?
2) <삼국지>에 나온 인물들이 실존 인물이다 보니 여기에 나오는 얘기를 사실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을까요?

이런 데서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대중성이라는 것 때문에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대중성이 <대망>보다 <삼국지>가 더 낫다라는 것은 저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기준으로 삼을 수 없는 것은 이미 이 글 전의 답변 '삼국지 vs 대망에 대한 덧글의 답변 II'에서 기준과 수준의 차이로 언급을 드렸습니다만 부연 설명해 봅니다.


위 글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대중성을 기준으로 삼으면 문제가 됩니다. '요코 이야기'라는 소설을 가치 판단할 때(이건 제 기준에서 역사소설도 아닙니다만) 대중성을 고려해야할까요? 역사소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사실들이 언급되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던 책이었는데 여기서 대중성이라는 기준을 제시하시겠습니까?


이번에는 영화 얘기입니다.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만든 영화라 사실적인 얘기는 언급이 됩니다. 그러나 제가 조심스럽게 봐야한다고 얘기했던 부분을 보시면 조금은 편파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것입니다. 허나 그것은 감독의 해석의 부분이기에 이런 면도 있다고 언급을 한 것이지요. 어조가 강하지는 않았던 겁니다. 해석은 자유니까요. 

그래서 영화가 가지는 대중성을 생각할 때 조심스럽게 봐야할 부분이 있다고 지적했던 겁니다. 영화에서는 <마리 앙투와네트>의 잘못을 그럴 수 밖에 없었다는 식의 뉘앙스가 풍겨지기 때문이지요. 이해가 안 되실 지 모르겠지만 아래의 글들을 좀 더 읽어보시면 이해가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수준의 차이라는 부분

'화려한 전쟁씬 VS 심리묘사'라는 부분에서 대망은 삼국지와 차원이 다른 전쟁씬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차원이 다르다기 보다는 '층위'가 다르다는 것 아닐까요? 초딩스러운 전쟁씬이라는 비관적 시선보다는 스펙타클한 전쟁씬 이라고 보실 순 없는 걸까요? 글서 글쓴이의 평가는 다분히 주관적이고 대망을 편들어주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자 우리가 역사소설을 쓴다고 생각해봅시다. 역사적 고증을 철저히 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조사를 해야하겠습니까? 그런데 너무 힘들어서 어느 정도 하다가 그냥 임의로 멋진 사건을 만들어서 넣고 재밌게 만들 수도 있겠지요. 역사적 고증이라는 것이 그에 상응하는 노력이 들어가는 매우 힘든 작업입니다.

자 그것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 고증을 통해서 한 사건을 두고도 다양한 이해관계의 사람들에게 당위성을 부여하면서 묘사하기 위해서는 작가는 이 사람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 보고 저 사람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 보면서 얘기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띄우겠다는 생각을 가지면 얘기는 쉬워집니다. 이 사람의 말과 행동에는 멋지게 쓰고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는 덜 신경 써도 되거든요.

그러나 나관중도 유비가 아닌 다른 인물들을 신경썼습니다. 근데 어떻게 신경을 썼냐면 왜곡을 시켜버린 것이죠. 이게 문제인 겁니다. 그리고 자신이 부각시키려는 인물은 없는 사실도 만들어냅니다. 역사적 실존인물을 거론하는 역사소설의 대중성을 생각할 때 이는 자칫 잘못된 선입견을 낳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 작가관의 수준 차이가 그들이 적은 작품에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님께서 주몽의 신화와 조선왕조실록을 두고 얘기를 하면 어떤 게 더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시게 되었나요?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안 드십니까? 그렇다고 해서 제가 주몽의 신화의 가치를 떨어뜨리자는 얘기인가요? 역사적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을 어떻게 비교 대상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정도의 차이일 뿐입니다.

'선과 악의 구도 VS 모든 이들에게 당위성 부여' 이 부분 역시 그렇습니다. 삼국지에서 조조는 극악한 캐릭터로 나옵니다. 하지만 초반부에 '치세의 능신이오, 난세의 간웅이다'는 부분에서 조조가 호탕하게 웃으면서 한편으로는 허소의 무례한 발언을 넘기는 장면이라던가 조조가 행실이 불량한 곽가를 예의바른 공융보다 중용한 부분들을 비롯해 삼국지에 등장하는 수많은 장면들은 독자들에게 '아~ 조조는 진짜 영웅이구나'고 생각하게끔 만듭니다. 악하지만 매력적인 캐릭터. 단순한 선악구도로만 삼국지를 바라보는 것은 너무 단편적인 평가 아닐까요?

제가 '선과 악의 구도 vs 모든 이들에게 당위성 부여'를 비교 기준으로 삼은 것은 전반적인 내용에서 보이는 면이라고 첫번째 답글에서 얘기를 드렸습니다. <삼국지>에서 님께서 조조에 대해서 느낀 부분이 전반적인 내용에서 보이는 면이라고 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삼국지>에서는 조조는 간웅입니다. 간사한 영웅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영웅다운 면보다는 간사한 면이 더 많이 그려집니다.

선악구도로만 삼국지를 바라보는 것이 단편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그런 부분을 언급하시면서 <삼국지>에는 다양한 시선이 존재한다고 얘기하시는 것이 단편적인 생각이라 여겨집니다. 저는 분명 첫 답변에서 전반적인 내용에서 보이는 면이라고 했고 이는 많은 <삼국지> 매니아들도 인정하는 부분인 것을 님께서 <삼국지> 편을 들기 위해서 들추어낸 근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근거가 미약합니다.

선과 악의 구도보다 모든 이들에게 당위성을 부여하는 것이 저는 더 어렵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도 수준 차이가 나는 것이지요. 이렇듯 치중한 부분이나 전반적인 내용에서 보이는 면 모두가 <삼국지>는 <대망>에 비할 바가 못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오히려 님께서 대중성만을 초점으로 해서 그래도 <삼국지>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재미있잖아요? 하면 저도 거기에 대해서는 뭐라 할 말이 없지만 이건 아니라고 봅니다.

이미 그런 피드백을 두어개 받았습니다. 거기에는 가볍게 얘기를 해줬지요. 재미있다는 데 어쩌겠습니까? 허나 재미있다고 해서 <삼국지>를 <대망>와 동급이나 우위에 두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대중적인 소설

'나관중과 야카오마 소하치' 라는 부분 역시 그렇습니다. 소하치가 일본에서 손꼽히는 역사소설가라면 나관중은 중국에서 손꼽히는 소설가입니다. 자국 내에서 손꼽히는 소설가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만, 그는 적어도 서민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대중적인 소설을 적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반복되는 이야기입니다. 대중적인 소설을 쓰는 것을 나쁘게 보는 것은 아닙니다만 대중성에 자꾸 포인트를 맞추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대중성보다는 작가관이 우선입니다. 대중적인 소설을 적었다는 것이 중요하다면 '요코 이야기'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대중적이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그것은 작가의 좋은 능력이지만 역사소설을 평가하는 데에 있어서는 생각을 달리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이 하나의 기준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보다 더 우선해야 하는 기준은 바로 사실에 입각해서 편파적이지 않은 시각을 가져야 하는 부분입니다. 만약 나관중이 그런 시각으로 대중적으로 재밌게 적었다면 저는 분명 <대망>의 편을 들기 보다는 <삼국지>의 편을 들었을 겁니다.


사실의 정도

삼국지는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나관중은 어느정도 각색이 필요했겠지만 전체적인 역사적 줄거리는 왜곡시키지 않았습니다. 삼국지에서 사실과 허구의 비율이 7:3 정도라면 대망은 2:8 정도일 것입니다. 저는 위와같은 정도의 차이가 대망이나 삼국지나 오십보백보라고 본 반면 글쓴이께서는 중요하게 부각시킨 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은 제가 꼬투리 잡으려면 잡을 수도 있는 부분이겠습니다. ^^ 7:3과 2:8이 어떻게 나온 것인가요? 왜냐면 객관을 너무 강조하시는 분이 수치화를 시켜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실 저는 이런 숫자는 크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니 괜찮습니다. ^^ 어쨌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분의 덧글에 대한 답글을 달았기 때문에 그것으로 대신합니다.

사실의 왜곡 범위
1) 없는 사실을 만들어냈다.
2) 시간이 다른 A와 B라는 사건을 같은 시간대로 얘기했다.

역사소설이고 그 당시를 아무리 역사적 고증을 한다 하더라도 그 상황을 있는 그대로 재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유는 사실을 두고도 해석의 여지는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이지요. 그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역사학에서도 매한가지의 문제입니다. 나관중은 <삼국지>라는 소설에서 위의 두 가지 실수를 모두 저질렀습니다. 그냥 소설이라고 한다면 상관이 없지만 역사소설이라고 한다면 이는 자칫 잘못된 문제를 야기합니다.

사실은 사실대로 두고 그 속에서 재미를 가해서 묘사를 한다던지(2만군을 20만군이라고 한다던지) 역사속 실존인물의 심리를 묘사한다던지(그 때 그 말을 듣고 아무개를 이런 생각을 했다라던지)는 작가의 역량으로서 충분히 볼 수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소설의 영역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해석의 차이

제가 이런 글을 단 주된 요지는 님께서 제시하신 기준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지적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 기준을 바탕으로 대망에 편들어주기 식으로 글을 적으셨기에 저는 삼국지를 편들어주기 위함입니다. 글쓴이께서 기준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기준을 바탕으로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본 것입니다.

지금까지 읽으시고 제가 편들어주기 식으로 그랬다고 생각하신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적어도 역사소설을 바라보는 관점은 저의 이전 글들을 통해서 충분히 제시했는데 느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뚜렷한 관점을 가지고 저는 비교를 했던 것이지 <대망>을 편들어주기 위해서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 계기는 <삼국지>와 <대망>을 동격으로 놓는다던지 <대망>이 재미없다 <삼국지>처럼 멋지지 않다 라는 것 때문에 적은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편협한 논리로 편들기 식은 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이문열의 삼국지

1) 제가 여러 작가들의 번역한 판본들을 모른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부분은 저로서 황당한 질문이네요. 글쓴이께서는 본 글에 이문열의 삼국지 외에 다른 삼국지 번역들을 언급하지 않으셨는데 제가 글쓴이께서 다른 삼국지 번역본을 알고계시는지 모르고 계셨는지 알 도리는 없습니다.

삼국지 다른 평역본을 언급하지 않았다고 해서 모르시겠다고 한다면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키 겐신 얘기를 언급해서 대망을 완독했는지 궁금해 하는 거랑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기 쉽지요. 그래서 저는 그것을 역으로 잘 활용하는 편입니다.

문제는 하나의 답글에 있는 내용이라는 것이지요. 무슨 말인고 하니 대망을 다 읽으셨나요 하는 질문에 씁쓸해 하신다면 이런 질문에 대해서도 입장이 똑같으니 이해를 하셔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내가 지적 받을 때는 씁쓸하고 내가 지적하는 것은 이해가 된다는 것은 저로서는 납득이 안 됩니다. 충분히 이해가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2) 그 판본들이 대부분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기초로 하고 있지 않나요? 이 질문은 당연히 '네'라고 말씀드릴 수 밖에 없네요.

3) 우리나라에서 '삼국지'해서 하나만 책을 꼽으라면 어떤 책이 꼽히나요? 물론 지금 현시점은 이문열의 삼국지가 가장 유명한 책이긴 하지요.

제가 원하는 답변 그대로 나왔습니다. ^^

하지만 이문열의 삼국지와 나관중의 삼국지는 엄연히 다릅니다. 이문열의 삼국지는 글쓴이께서 지적하셨지만 '평역'입니다. '직역'과 다릅니다. 우리나라에는 김구용 선생이 번역한 삼국지 '직역본'이 있습니다. 단지 대표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평역'이라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음에도 이문열의 삼국지와 소하치의 대망을 비교한 것은 그릇된 비교 아닐까요?

글쓴이께서 엄밀하게 '나관중의 삼국지와 소하치의 대망을 비교한 것입니다' 라고 말씀하셨다면 이문열의 삼국지는 언급하지 않으셨어야 했습니다. 이문열의 삼국지는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정확하게는 모종강본)를 다시 꼬아서 내놓은 것이거든요. 이문열의 삼국지 = 나관중의 삼국지 라고 하는 부분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이제 님께서는 화두를 이문열의 <삼국지>로 돌리고 계십니다. 제가 이전 답글에 대표성이라는 것 때문에 이미지로 사용을 했고 이문열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김훈과 비교를 했으며, 삼국지를 비교할 때는 나관중과 야마오카 소하치를 비교한 것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잖아 하시는 거 아닙니까? 그럼 왜 언급을 했냐고 하시니까 말입니다.

제 글에서 이문열의 <삼국지>=나관중의 <삼국지>라는 생각을 어떻게 하셨는지요? 이해를 할 수가 없군요. 분명 제가 알기 쉽게 설명을 드렸는데 말입니다. 제가 이문열의 <삼국지>를 비교한다면 왜 '나관중 vs 야마오카 소하치'라는 작가관을 초반에 언급을 했을까요? 그리고 '화려한 전쟁씬 vs 심리묘사'라는 부분의 첫 단락의 일부를 옮겨봅니다.

정사 삼국지를 읽어보신 분이 있으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정사 삼국지 즉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삼국지를 읽어보면 나관중의 삼국지삼국지연의에서 등장하는 화려한 전쟁, 전투씬은 사실과는 다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문열의 <삼국지>와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망>을 비교하는 사람이 왜 정사삼국지를 들먹이고 나관중의 삼국지 즉 삼국지연의라고 뚜렷하게 명시를 하면서 얘기를 풀어나갔을까요? 제가 님의 얘기에 답변을 할 때 언급을 안 한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시는 것은 이해를 못 하시는 것이라든지 아니면 꼬투리 잡기 밖에 안 된다고 봅니다. 전 결코 그렇게 생각해서 글 적지 않았습니다. 자꾸 몰아가지 마시길 바랍니다. 몰아가는 건지 아닌지는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판단하시겠지요.


몇가지 드리고 싶은 말

저도 갑자기 장문의 글을 쓰려고 하니 손이 아프네요. 평소 글을 쓰지 않은 탓인가 봅니다. 혹시 제가 의도하지 않은 부분에 있거나 혹은 그릇된 문법을 사용하여 글쓴이께서 오해를 하고 계신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제가 표현을 잘못한 탓일 겁니다. 앞서 말씀하신 '문제의식'이라던가 '역사적 배경'이야기와 같은 부분이 그러한 예가 될 수 있겠죠. 이 부분은 저 역시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문제의식'에 대한 용어의 사용 그리고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신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잘 알겠습니다. 표현을 잘못해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다만 제가 그런 얘기를 드리려고 그런 것은 아니고 제게는 가급적 생각을 잘 정리해서 얘기를 해주시면 고맙겠다는 말씀을 우선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번 글은 상당히 깁니다. 그러나 이 글을 읽어보시는 분들이 서로의 입장을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저는 덧글을 다신 님의 글 전문을 다 인용해서 올려두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님께서 제 글을 다 인용해서 조목조목 얘기해달라는 얘기를 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제가 여기서 언급된 사항들은 꼼꼼히 얘기를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것과 저것을 믹스 시킨다고 한다면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믹스를 시키지 않으면 글은 길어지지만 어차피 앞에서 했던 얘기의 변형이 다시 언급이 되니 오해의 소지는 없어질 수 있고 그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저는 말이나 글, 행동 등에서 의도나 생각등을 잘 유추하는 편이니 제가 이해 못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편하게 기술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글에 대한 답글은 천천히 적으셔도 됩니다. 1달이 되어도 되고 1년이 되어도 상관없습니다.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위와 사항들을 고려하셔서 적어주셨으면 하는 바람만 있을 뿐입니다. 사실 첫 답글은 참 재미나게 적었습니다만 이번 답글은 고생 좀 했네요. 내용이 많아서 말입니다. 적고는 싶은데 다른 적고 싶은 글도 있고 또 다른 해야할 일도 있고 하다 보니... 그래도 가급적 빨리 적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삼국지>에 대한 얘기는 언제 해도 재미있는 테마이긴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