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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9월 30일 본 나의 2,687번째 영화.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편 249번째 영화.
영화 매니아라면 봐야할 영화 100편 46번째 영화.
보통 <영화 매니아라면 봐야할 영화 100편>에 올려진 영화라면
영화사에서 길이 남을 만한 작품성, 예술성 중심의 영화들이 많아서
내가 이해하기 힘든 영화라서 별로였는지도 모르겠다.
특히나 이 영화는 프랑스 영화다. 아트 필름이라 불리는 영화가 특히나 많은...
그래도 가끔씩 그런 영화들 중에서 좋은 영화를 만나면
평론가의 평도 들어볼 만하다는 생각을 하곤 하지만
이런 영화를 만나면 참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갖고
이 영화가 대단하다고 하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나중에 읽어보면 영화 내용보다는 영화사에서나 의미있을 만한
내용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럼 영화 공부하는 사람에게나 보라고 하지.
결국 나는 영화 매니아가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는 듯 하다.
개인적인 생각에 대단한 작품이라는 생각은 전혀 안 든다.
그리고 나름대로 해석하기에는 모순도 보인다.
뭐랄까 예술성은 있어도 논리성은 떨어지는 감독의 작품이랄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고, 추천하고 싶지는 않은 영화다.
재미도 없고, 내용도 배울 게 없고, 감독의 말에는 동의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그렇다.
게임의 규칙이란?
이 영화를 어느 누가 봐도 게임이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알 수 있다.
사랑이다. 근데 사랑이라고 표현하고 싶지는 않다. 왜냐?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불륜이거든~
사랑이라 하기에는 윤리적, 도덕적으로 다르게 부르는 용어가 있단 얘기다.
불륜 그 자체를 소재로 해서 내가 싫다는 게 아니다.
그렇게 따지면 비판할 영화 참 많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도 그런 의미에서는 비판 받아야할 영화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문제 삼고 싶지는 않다.
그럼 불륜의 규칙은 뭔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사람들의 얽히고 섥힌 애정행각들의 실타래 속에서
그런 규칙을 찾기는 상당히 어려워 보인다.
나름대로 이리 저리 접근을 해보았다.
1) 이해 당사자들끼리 매듭을 지어라.
주인공 앙드레와 크리스틴이 도망치려고 하기 전에 앙드레가 하는 대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부분인데, 이렇게 생각한 것은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규칙'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대사가 그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앙드레는 죽는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이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앙드레의 죽음은 매우 우발적인 사고였기 때문에
꼭 그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2) 나의 불륜을 알리려 하지 말라.
르누아르 감독은 이렇게 얘기한다.
나는 모든 게임이 규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규칙을 깨서 주인공 앙드레가 죽었다고 아래의 평론에는 그렇게 적혀 있다.
그 규칙을 깨뜨리는 이는 게임에서 지는 것이다.
앙드레의 죽음에 의미를 둔다고 한다면 1)이 아닐테고 1)에서 앙드레는 유일하게
자신이 사랑하는 크리스틴(남편이 있는)을 얻기 위해서 크리스틴의 남편에게
얘기를 하고 매듭을 지으려고 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안 들키려고 하는 반면에 말이다.
이게 주제가 될 수 있는가?
3) 불륜을 남에게 들키지 않고 조용히 해라.
크리스틴이 앙드레에 대한 감정을 달리 가지게 되었던 부분도 결국은 크리스틴이
남편이 바람피는 것을 목격하고 나서이고 영화에 등장하는 많은 얽히고 섥힌 관계들 속에
영화 종반에 치고 받는 싸움을 하게 된 계기가 다 이런 부도덕한 관계의 실마리를
제공해서이다. 또한 앙드레가 죽게된 이유도 우발적인 사고이긴 하지만 그렇게 된
연유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또한 불륜의 목격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물론 그 불륜의 대상이 자신의 마누라가 아니었음에도 착각해서 벌어진 일이라
우발적인 사고라고 얘기를 하는 것이고...
그럼 이게 감독이 얘기하고자 하는 것일까?
4) 인생은 멈추어 있지 않고 항상 흐른다.
이건 감독이 말하는 주제다. 도대체 이런 주제를 어디서 느낄 수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이런 주제를 얘기하는 데에 꼭 이런 얘기를 해야만 잘 전달이 되는가?
난 솔직히 감독의 생각을 이해할 수가 없다. 아주 맘에 안 든다.
내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 가능한 "게임의 규칙"은 이해를 할 수가 없다.
너무 얽히고 섥힌 등장인물들의 관계와 행태들 속에서
일관되고 공통적인 "규칙"이라는 것을 찾기는 힘들었다.
크리스틴의 행동도 남편이 불륜을 하니 나도 해야지 라는 심보라고 보이는데
이 남자에게, 저 남자에게 사랑을 운운하고 급기야 자신의 오빠에게도
사랑을 표현하는 참 어처구니 없는 행동을 보인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크리스틴이라는 여주인공은 무명 배우라는 것을 감안할 때
감독이 발탁하고 자신이 어찌 좀 해보려고 그런 어거지 설정을 해서
키스라도 해볼려고 하는 심보가 아닌가 하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까지도 했었다. ㅋㅋㅋ
왜? 여기서 오빠 역으로 나오는 옥타브가 바로 감독 장 르누아르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뭐가 대단한가?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와 같이 관점을 관점을 그 두 사람에게만 맞추어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는 로맨스인가? 전혀 아니다.
불륜을 다루면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세태의 반영을 묘사한 영화인가? 아니다.
그럼 불륜을 다루면서 비극적 종말을 맞게 되어 이러지 마라 하는 영화인가?
일부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는 있겠다.
나름 영화에서 보이는 부분들이 여느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상류층에 대한
따가운 시선, 비판을 담고 있는 것처럼은 보인다. 그러나 감독이 얘기하는 주제는
그게 아니지 않은가? 당시에 이 영화는 그렇게 해석이 되어 논란이 되었다고 한다.
사실 지금 봐도 그 내용이 참 난잡하고 추잡하다.
그런데 영화가 만들어진 1939년에는 얼마나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그러나 꼭 그렇게 상류층의 비판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것이
영화 속에는 상류층이 아닌데도 불륜을 저지르려는 모습들이 보인단 말이지.
결국 이 영화는 내가 볼 때는 나름 자기 딴에는 이리 저리 늘어놓은 것은 많은데
매우 논리적이지 못하고 일관되지 못해서 전해주는 메시지가 불분명하다는 거다.
그렇다고 재미있느냐? 결코 재미있지는 않다. 좀 지루한 면도 없지 않다.
다만 한가지 재미있었던 부분은 얽히고 섥힌 관계들 때문에 발생하는 상황들인데
그것은 거의 영화 끝부분에서나 볼 수 있는 부분이고 그 외에는 그다지 재미가 없다.
재미도 없어, 감흥도 없어, 주는 메시지도 불분명해, 헷갈려.
보고 나니 기분 더러워져. 내용도 추잡스러워. 뭐가 대단한 건지 나는 알 수가 없다.
평론
영화평론가이자 부산예술학교 교수인 김지석교수의 評
1956년, 파리의 시네클럽을 운영하던 장 가보리와 자크 마르샬이 창고 속에 처박혀 있던 <게임의 규칙>의 필름을 발견해 냈다. 이 필름은 그뒤 3년이 지난 1959년에 1939년의 원판에 거의 가까운 상태로 복원되어 다시 공개됐다. 이 작품의 전면적인 재분석에 들어간 영화평론가, 학자들은 영화사상 가장 복잡한 등장인물간의 관계와 풍부하고도 상징적인 영상기법에 놀랐다.
후작 로베르의 성에서 열리는 사냥파티에 참가한 상류계급 사람들간의 갈등과 하인계급 사람들간의 갈등, 그리고 이들 두 부류 사이의 얽히고 설킨 갈등이 마지막에 가서 만나는 플롯을 통해 장 르누아르는 '사회의 각 계층'에 대해 관심을 보인다.
그러나 상류·하류계급의 등장인물의 관계가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관객들은 여러번 이 작품을 보지 않고서는 그 관계를 이해하기 힘들다. 상류계급의 경우 후작부인 크리스틴은 젊은 비행사 앙드레, 앙드레의 친구이자 아버지의 친구였던 옥타브, 생오뱅과 미묘한 관계에 빠지고 로베르는 주느비에브와 연인관계이다.
로베르와 주느비에브의 관계는 옥타브가 알고 있으며 크리스틴도 알게 된다. 하녀 리제르는 남편 슈마허와 새로운 하인 마르소와 삼각관계에 빠지며 이들의 관계가 엉뚱하게 앙드레의 죽음을 불러 일으킨다.
르누아르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나는 모든 게임이 규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 규칙을 깨뜨리는 이는 게임에서 지는 것이다." 여기서 게임의 규칙은 상류사회의 결혼과 간통, 사냥 등이며 하인계급의 유희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게임은 궁극적으로는 성의 게임이며 또 서로 얽히고 깨어지지만 상류사회의 그것이 보다 '위선'적이다. 앙드레는 이러한 규칙을 깨뜨리기 때문에 죽음을 당한다. 르누아르는 그 자신이 직접 옥타브로 출연하여 이들의 성적 게임의 매개자이자 또 참여자가 된다. 그래서 유려한 카메라워크는 옥타브를 중심축으로 이동해 나간다. 카메라는 그를 따라다니며 귀족계급과 하인계급의 사회를 자연스럽게 대비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손 웰스의 <시민 케인>(1941)의 딥 포커스 촬영이 이미 여기서 확고한 미학적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영화적 공간개념을 확장시킨 것이다. 전심초점 공간의 표현으로 깊이감을 강조하였을 뿐 아니라 등장인물들로 하여금 프레임의 경계를 계속 드나들게 함으로써 훗날 영화학자 노엘 비루시가 체계적으로 분석한 외화면공간(오프스크린)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르누아르의 탁월한 연출기법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클로즈업이 거의 배제된 풀숏화면의 배경이 되는 세팅과 의상코드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다중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남성성/여성성, 우아함/천박함, 전통/현대, 도시/시골, 상류/하류계층 등).
이처럼 이 작품에서 르누아르가 20세기초 프랑스 사회의 모든 계층을 들여다보는 영화적 형식은 독창적이기도 하지만, 프랑스의 방대한 문화적 전통과도 맞닿아 있다. 18세기 프랑스 코미디 야외극의 전통과 뮤세, 보마르세, 마리보의 영향에서 낭만주의 회화의 전통에 이르기까지 <게임의 규칙>에 세세하게 스며있는 문화적 전통은 왜 르누아르의 영화가 프랑스인들로부터 그토록 사랑을 받았는지를 짐작케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