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람들은 비인간적인 명령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일까?
왜 정의롭지 못한 권력자의 명령을 거부하지 못하는 것일까?
왜 평범한 사람들이 끔찍한 대량학살을 저지르는 것일까?
왜 정의롭지 못한 권력자의 명령을 거부하지 못하는 것일까?
왜 평범한 사람들이 끔찍한 대량학살을 저지르는 것일까?
이것이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 교수가 1961년 했던 전기 충격기계 실험의 이유였다.
그리고 이것을 막기 위해서 취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불합리한 명령을 내리는 권위자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는 것이다.
나는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에 언급된 스탠리 밀그램의 실험을 보고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이 동영상에서 보여준 붉은털 원숭이의 실험을 보면서 느꼈다.
붉은털 원숭이가 보여준 것은 바로 생이지지(生而知之)다. 1
이 실험이 붉은털 원숭이가 인간보다 낫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붉은털 원숭이보다 나은 인간이 당연히 알만한 것을 왜 그랬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리라.
만약 인간도 원숭이와 같이 권위자와의 관계가 단절된 상황이면 마찬가지였으리라.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말이다.
인간이면 이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생이지지)
그렇게 하지 못했던 이유는 바로 관계(Relation) 때문이라는 것이다.
수평적 관계는 상관없겠지만 수직적 관계에서는 이런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과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자의든 타의든 조직이라는 곳에서
사회적 관계를 가져야하는 것을 볼 때 악용될 소지도 있다는 것을 느꼈다.
결국 이러한 실험 결과를 안다는 것이 특정인들에게는 이용 가능한 좋은 미끼를 주는 것은 아닐지...
이 실험의 참가자들도 실험에 참가하고 받은 돈의 액수를 생각하면,
그들도 얼마든지 그 실험을 포기할 수 있었다.
그 돈이 그들의 생계를 책임질 정도의 돈이 아니었기에...
이 또한 스탠리 밀그램의 의도가 아니었나 싶었다.
돈의 액수가 크면 그만큼 그것 때문에 실험에 임하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실험이 되려면 포기를 해도 그만일 정도의 적은 액수여야 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65%가 실험자의 권위에 복종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결과다.
나는 35%에 속할 것이라고 생각을 해도
단순히 말이 아닌 부득이한 상황을 연출한다면 얘기는 다를 것이다.
지금의 상황은 우리가 결과를 알고 있는 바이지만
새로운 부득이한 상황에서는 어떤 판단을 내릴 것인가?
권위를 가진 어떤 누군가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그러한 비인간적이고도
불합리한 일을 돈과 같은 좋은 미끼와 함께 제시한다고 한다면...
최근 본 영화 중에 <더 버터플라이>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를 보면 불합리한 상황을 누군가가 만든다.
이것은 인간의 욕망, 욕구라는 미끼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잃게 한다는 것을 이용해서 말이다.
(물론 영화 속에서는 조금 이해가 안 가는 구석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실험이었다.
예전에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에서 이 실험을 읽고서는 생각 못했던 부분이다.
더불어 여섯 단계의 분리(six degrees of separation)를 알게 된 지금에서는
비인간적이고 비합리적인 행위가 쉽게 전파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 삼지(三知)에 대해서 포스팅한 글이 있다.
위의 실험을 보고 생각해보건대,
배워서 아는 것(學而知之, 학이지지)과 경험해서 아는 것(困而知之, 곤이지지)이
서로 충돌할 때는 선택의 문제겠지만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히 아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응당 선택해야 하는 도리가 아닐까 싶다.
[ 관련 도서 ]
링크 알버트 라즐로 바라바시 지음, 강병남 외 옮김/동아시아 |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로렌 슬레이터 지음, 조증열 옮김/에코의서재 [ 내 리뷰 ] |
-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깨달음에 이르는 것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