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 갑자기 연락이 한통 왔다. 주차한 차를 박아서 죄송하다고, 보험 처리해드리겠다고. 본인의 아버지가 오고 계시니 오시면 해드리겠다고. 알았다 하고 상태 확인하러 갔다가 깜짝 놀랐다. 가벼운 접촉 사고 수준일 줄 알았는데 이거 뭐 전봇대를 들이받은 듯 심하게 파손이 되어 있는 거였다. 이거 돈 많이 나올텐데... 음주인가 생각했는데, 음주였다면 상대측 보험회사에서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았을 거라 음주는 아닌 거 같고, 갓 20살 되어 운전 면허 딴 지 1달도 안 된 초보 운전자의 운전 미숙으로 그런 듯 싶다. 아마 놀라서 액셀을 더 세게 밟은 게 아닌가 싶은.
갑작스런 생이별
앞범퍼는 찢어져서 너덜거리고, 우측 휀더, 우측 헤드라이트는 손상되었고, 그릴 파손, 본넷은 밀려서 휘어졌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다. 얼마나 세게 밀었으면 뒷바퀴쪽 주차턱을 넘도록 밀려서 벽 모서리에 뒷범퍼가 부딪혀서 뒷범퍼도 깨졌다. 지금까지 내가 주차해서 테러 당한 적이 여러 번이다. 희한하게도 연중 행사인양 최근 4년 연속 당하는데(일본 차라 그런가?) 그래도 이번처럼 연락 오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다 얌체같이 얘기 안 하고 간다. 물론 나는 독사같이 CCTV 다 뒤져내서 잡아낸다. 그런 경우에는 일부러라도 렉서스 A/S 센터에 차 넣어서 금액 최대한 나오게 한다. 괘씸하니까. 내 경험상 양심 없는 사람 정말 많더라.
렌트카 지원 일수
사고로 인한 렌트카 지원 일수는 25일이 한도다. 공임 시간이 160시간 초과되는 경우에는 30일까지. 그런데 내 경험상 차량 상태를 봤을 때, 25일 만에 수리될 거라고는 보지 않았다. 게다가 그 기간이라는 것도 확정적이지가 않을 것이다. 이유는 단종된 모델이라 부품이 있을 지가 관건이고, 있다고 하더라도 국내에 없어서 해외에서 가져와야 하는 경우도 생길 거라서다. 그래서 렉서스 A/S 센터가 아니라 상대측 보험사의 지정 공업사에 넣었다. 어떻게 해서든 빨리 수리되는 방향으로 한 번 체크해봐달라는 의미였다. 물론 상대측 보험사에서 지정한 공업사로 옮기면, 유도리(?)를 발휘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요즈음은 안 그런다고? 나는 그런 말 안 믿는다. 예전보다 어려워졌다 해도 방법이 다 생긴다고 보는 입장이라) 나는 차가 빨리 나오는 게 나았으니까.
그러나 전손 처리로 인한 폐차가 결정이 되면 최대 10일까지가 한도다. 그럼 폐차 결정되고 나면 10일 이내에 차를 구해야 내가 불편함이 없단 얘기. 그래서 일단 최대한 수리해보자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10일 안에 차를 구한다는 게 그리 쉽지는 않으리라 생각해서 말이다.
중고차가액 < 수리비
공업사에서 확인해 보니 부품값만 중고차가격보다 높다. 공임비까지 더하면 역대 최고 수리비가 나올 듯. 보통 전손 처리 기준이 이제 나는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왜냐면 수리비는 사고 직전의 차량가액 그러니까 중고차가격의 120%까지는 처리 가능하니까. 나에겐 두 가지 선택이 있다.
1. 그래도 수리 받는다.
2. 중고차 시세로 받고, 폐차한다.(전손처리)
차량 유지비 얼마 안 들겠다, 잔고장 없겠다, 아직 차를 바꿔야겠다는 생각하지 않았던 나로서는 갑작스런 상황에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했다. 솔직히 왜 가만히 주차선 지켜서 잘 세워둔 차량을 박아서 내가 이런 고민을 하게 만들지 하는 생각에 짜증도 나긴 했지. 비록 하차감 1도 없는 차량이라 뽀대나진 않지만 꽤 오래 타고 문제 없어서(잔고장 단 한 번도 난 적이 없었던 듯)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그리 들지도 않았었거든. 그러나 이렇게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다 보니 어떤 게 합리적인지 따져보게 되고 결국 전손처리하기로 했다.
문제는 렌트카 지원이 10일 밖에 안 되기 때문에 10일 내에 차를 구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린 거다. 이거 때문에 지난 주 엄청 바빴던 거다. 그리고 전손처리하게 되면 이후 차량은 보험사 소유가 된다. 그러니까 전손처리하고 차 부품 팔 수 있는 거 팔고, 고철 팔 순 없단 얘기.
보상받는 중고차 시세 기준
보통 이렇게 보상을 받는 경우에 사람 심리는 자신이 받는 보상이 최대가 되도록 노력한다. 그러나 그런 일이 지금껏 얼마나 많았을까? 그래서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는 법. 보험회사에서 보상해주는 중고차 시세 기준은 카마트 자동차 매매 사업조합의 중고차 시세 기준이다. 이거 일반인들이 확인할 수 있는 곳이 있다.
https://www.ggkucar.info/carprice/price.html
여기에 조회되는 게 카마트 자동차 매매 사업조합의 중고차 시세다. 단, 주의할 것은 해당 중고차 시세는 차량 상태가 상급일 경우다. 상대측 보험사에서 조회한 내역서 뽑아달라고 했더니 컴퓨터에서 조회한 부분을 사진 찍어서 보내왔더라. 그거 보니까 중고차 시세가 상, 중, 하로 나뉘어 있던데, 내가 비교해보니 위 사이트에서 나온 가격은 상급 기준이더라. 본인 차량 상태가 상급이 아니면 조회한 기준보다 덜 받게된단 말. 내 경우에는 상급으로 처리해주더라. 당연하지. 상급으로 처리해도 지네들은 덜 손해보는 거 아닌가? 수리한다고 하면 그보다 훨씬 많은 돈을 써야 하는데 말이다.
사실 내 차에 불만은 없었지만, 중고차로 팔 엄두를 내지 않았던 건, 비록 내가 낸 사고가 아니라 하더라도 12년 넘게 타고 다니면서 수리한 이력이 많아서다. 그렇지만 km 수는 12년 넘은 차 치고는 많지 않다. 15만 km. 중간에 차를 아예 안 끌고 다닌 적(해외에 있는 경우)도 있었고, 다른 차량을 이용한 적도 있었기 때문. 게다가 나는 사무실을 집과 가까운 데에 잡다 보니 이동 거리가 그리 많지 않거든. 만약 내가 중고차로 팔게 된다면 상급으로 평가되지는 않을 거라 어쩌면 이번에 처분하는 게 여러 모로 나에겐 득이라 생각했다. 나도 득이고 보험사에서도 득이고. 그래서 폐차하기로 결정했다.
차량 구매시 취등록세 지원
그리고 하나 더 있다. 전손처리 되는 경우에는 다음 차량 구매 시 취등록세 지원해준다. 그렇다고 취등록세 전액을 지원해주는 게 아니라 기준이 있다. 내가 받는 보상액(중고차 시세)의 7%까지. 그러니까 내가 전손처리되어 중고차 시세대로 1,000만원을 받았다고 한다면, 1,000만원 차를 살 때 내는 취등록세 7%인 70만원까지만 지원해준단 얘기다. 게다가 이렇게 지원해준다고 해서 중고차 시세대로 보상액 입금할 때 같이 입금해주는 게 아니라 차량 구매하고 취등록세 낸 내역을 증빙해야만 지원해준다는 것. 이왕 지원할 거 깔끔하게 보상액 * 1.07 해서 주면 좋겠지만 그렇게 안 해준다.
12년 넘게(정확하게 12년 4개월 정도 되는 듯) 타고 다녔던 차인데, 폐차시키려고 보니까 왠지 모르게 느낌이 그렇긴 하더라. 물건에 집착하는 성격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기계지만, 사람도 그렇듯 함께 공유한 추억이 많을수록 헤어짐으로 인한 상처가 더 깊듯, 이 차 타고 겪은 수많은 추억들 그리고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세월을 함께 했던 차였기에 그런 느낌이 들더라. 언젠가는 떠나보내야할 녀석이긴 했지만 갑작스런 사고로 떠나보내 나는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가 안 된 상황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누군가의 손에 넘겨주는 게 아니라, 처음 출고되었을 때부터 폐차까지 나랑 함께했던 녀석 떠나보내다 보니 그런 생각 들더라. 이제 새로 만날 녀석은 오래 안 타련다. 2-3년 정도만 타고 내다 팔던지 해야지 하는.
아 근데 오늘 갑자기 생각난 건데, 정리하면서 글 적다가. 차에 레이밴 선글라스 놔두고 안 가져왔네. ㅠ 안경보관함을 확인할 생각을 못했다. 자주 사용하는 게 아니다 보니. 아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