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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영화

해석하려고 하면 머리 아픈 <페르소나>

페르소나 포토
감독 잉그마르 베르히만
개봉일 1966,스웨덴
별점
2007년 8월 9일 본 나의 2,664번째 영화.
영화 매니아라면 봐야할 영화 100편 42번째 영화.
죽기 전에 꼭 봐야할 영화 1001편 240번째 영화.

얼마전 타계한 잉그마르 베르히만을 좋아하는 많은 영화팬들에게 우선 미안하다.
왜냐? 난 이 영화에 최악의 개인 평점을 줬기 때문이다. 1점.
왜? 뭔 말인지 도통 알 수가 있어야지.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다.

처음 나오는 몇 장면부터 왠지 모르게 '데이빗 린치'의 <이레이저 헤드>란 영화가
생각나기 시작하더니 결국 내 머리를 부여잡고 노려보는 눈으로 영화를 봤다.
그래도 모르겠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OTL.
이게 정말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

수전 손택이 이런 얘기를 했다.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과 세계에 대해 가하는 복수다."
해석하지 말아야 하나? 근데 비평가나 평론가들은 또 해석하고 있지 않은가?
예술영화라는 이 영화가 그냥 예술로만 봐야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잉그마르 베르히만은 자신만이 알아볼 수 있는 암호로 얘기하는 듯 하다.
그 암호를 희한하게도 예술적인 머리로 해석을 하는 대단한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그 암호는 그들만이 통하는 암호인 듯 느껴진다. 내 머리는 도무지 해석 자체가 안 된다.

내가 살면서 지금껏 본 영화 2,664편. 그 중에서 1점짜리 영화 고작 3편.
그 중에 한 편이 바로 이 영화다. 나를 탓해야 할까 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내가 영화에 대해서 갖고 있는 주관은 예나 지금이나 바뀐 적이 없다.
내가 보고 내가 점수 매기는 데는 뭐라할 수가 없겠다. 이 영화의 가치를
논하는 것은 그래서 금하려고 한다. 나는 위와 같은 연유로 1점을 줬을 뿐.

도무지 해석이 안 되서 이리 저리 뒤져서 평론을 찾아서 읽어보았다.
만약 조금의 이해를 하고자 한다면
우선적으로 페르소나라는 뜻을 이해하고 봐야할 필요가 있겠다.

*   *   *


아래는 영화평론가이자 국립영상원 김소영교수가 적은 評이다.
처음에는 이 評 부분 부분에 나의 해석을 곁들였는데,
별로 해석하고 싶지가 않다. 왜? 해석해도 모르겠더라는... ^^
그냥 그런가 부다 하고 한 번 읽어보기를 바란다.

펠리니는 그를 '중세의 음유시인'이라고 불렀고 고다르는 낭만적이라고 했다. 나라면 그를 낡은 예술 영화의 묘지기라고 부르겠다. 잉마르 베리만이 스웨덴에서 영화를 시작한 46년정신분석학과 결합한 실존주의가 전후의 젊은이들을 사로잡고 있던 시대였다. 영화사적으로 보자면 네오레알리슴이 그 새로움을 천명하던 시기였고 안토니오니와 고다르의 모더니즘 영화들이 나오기 이전이었다.

<제7의 봉인>과 <처녀의 샘>들이 국제적으로 알려지면서 베리만은 말 그대로 예술 영화의 대부가 되었다. 베리만의 종교적 색채를 쏟아부은 존재에 대한 사색과 특히 여성에 대한 '심오한' 정신분석 그리고 영화 안에서 영화 매체에 대해 언급하는 성찰적 태도 등은 영화의 예술성을 증거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이후에도 영화적 예술성은 종종 베리만식 형식과 내용에 견주어 논의된다는 이야기다. 아마도 타르코프스키가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하지만 국제적 명성과 달리 그 당시 스웨덴의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은 베리만을 그리 자랑스러워하지 않았다. 스웨덴식 사회주의의 집단성에 대한 고민과는 달리 그는 개인의 심리나 종교적 문제에 매달렸고 이런 것들은 그 당시에도 이미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완벽하게 고립시킬 수 있는 개인 소유의 섬에서 베리만은 흔들리지 않고 영화들을 만들어 갔다. <페르소나>는 <어두운 유리를 통해> <겨울빛> 그리고 <침묵> 이후의 2번째 3부작 가운데 한편이다.

<페르소나>는 제목 그대로 가면과 그 가면 뒤에 있다고 추정되는 본질에 관해 복잡한 질문을 던진다. 영화가 시작되면 제물로 올릴 양이 살해되는 장면과 못이 박힌 손 등의 기독교적 이미지와 죽음과 악이 등장하는 스웨덴의 초창기 영화, 클로즈업으로 확대된 커다란 거미, 영화 카메라와 스크린 등이 보인다.

그리고 침상에 누운 아이가 지켜보는 가운데 두 주인공 엘리자베스(리브 울만)와 알마(비비 앤더슨)의 이미지가 중첩된다. 영화의 서두에서 <페르소나>는  이와 같이 꿈과 같은 형식으로 복제예술과 공연예술이 현실과 맺고 있는 관계, 모성과 죄의식 그리고 인간의 이중성 등의 문제들을 응축적으로 제시한다.

이 영화에는 세명의 여자와 두명의 남자가 나온다. 남자들은 피상적으로 등장하는 반면 여자들은 수수께끼 같은 존재로 재현된다. 결코 사회적 가면을 벗지 않는 여자 의사와 달리 여배우인 엘리자베스와 간호원 알마는 그 가면을 벗는 순간 정체성 위기를 맞는다. 알마는 연극 <엘렉트라> 공연 도중 언어를 거부하게 되면서 예술과  남편 그리고 아이를 포기하게 되는 엘리자베스를 돌보기 위해 함께 섬으로 떠난다.

곧 결혼해 안정된 삶을 살기를 욕망하던 알마는 위기에 빠진 엘리자베스에 동일화하게 되면서 임신 중절 수술이나 난교와 같은 과거의 죄의식이 여전히 자신을 억압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처음에는 알마를 관찰하며 가학적 쾌락을 즐기던 엘리자베스 역시  점차 그녀의 어두움의 세계로 끌려간다. 그리고 자신 안에 숨어있던 공포스런 죄의식과 조우한다.

영화에 사용되는 유대인 학살을 기록한 필름과 베트남전의 분신 장면들은 이렇게 제어할 수 없는 공포를 가시화하는 데 차용되지만 사실 좀 자의식적인 듯이 보인다. 그러고 보면 위에서 이야기한 양과 거미라든지 못박힌 손, 정체성의 융합과 분리 그에 따른 혼란, 이 모든 것들이 실제로 어딘지 예술연하는 수사학적 과장으로 보인다.

돌아보건대 베리만의 영화적 실험은 이제 그 시효를 다한 듯이 보인다. 시간은 상징과 상투성의 차이를 급히 무화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아마도  베리만이 이즈음의 영화사나 영화 연구에서 잊혀진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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