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而知之 생이지지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깨달음에 이르는 것
學而知之 학이지지
배워서 깨달음에 이르는 것
困而知之 곤이지지
고생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것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깨달음에 이르는 것
學而知之 학이지지
배워서 깨달음에 이르는 것
困而知之 곤이지지
고생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것
가만히 살펴보면 생이지지는 감성, 학이지지는 이성 및 지성, 곤이지지는 경험에 기반한다.
그리고 직관이라고 하는 것은 三知를 두루 갖추었을 때 가능한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 두루 갖추어야 하는 지에 대한 기준은 없다.
역사 속에서 이성적인 판단과 직관적인 판단 중에 어떤 판단이 더 옳았을까?
직관적인 판단이 옳았던 예가 더 많다고 한다.
그러나 한가지 유의해야할 것은 직관이라는 것이 생이지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학이지지와 곤이지지의 부단한 후천적 노력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학이지지와 곤이지지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판단만 하고 행동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이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행동에 제약이 생기는 법이다.
몰랐을 때는 저지르고 보지만 배워서 알게 되거나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되면
이래서 못하고 저래서 못하게 되는 것이 그런 이유다.
그래서 똑똑할수록 행동이 느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알면 알수록 주의의 시선을 의식하여 행동에 제약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해보지 않으면 그 결과를 알 수가 없다.
예측이라고 하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는 한낱 이성적인 판단 밖에 되지 않는다.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서 참고해야 하는 것이지 그것을 맹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새로운 일에는 그 누가 경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시행착오는 겪을 수 밖에 없다.
완벽을 기하기 위해서 생각만 하고 있으면 시간만 흘러간다.
같은 일이라도 누가 하느냐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느 정도까지 예측을 하고 계획을 잡아야 할 것인가?
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예상치 못한 일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학이지지와 곤이지지를 통해서 쌓은 것이 많다면 이러한 때에 순간적인 판단에 유용하다.
말로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건 된다' '이건 아니다'는 것을 그냥 느끼게 되는 것이다.
결국 직관이라는 것도 노력하지 않고서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