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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독서

중용 인간의 맛: 내가 이해했던 중용은 중용이 아니더라


도올 김용옥 선생의 책을 읽다 보면 참 많은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런 사고의 흐름 속에서 마음이 평온해지는 걸 느끼는 걸 보면 도올 김용옥 선생의 글은 나에게 잘 맞는 거 같다. 가끔씩은 날이 선 문장이 눈에 띄지만 나 또한 그런 스타일이기에 사실 그게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 보다는 통쾌함을 느끼게 해주기도 한다. 그래서 이런 책은 읽고 나면 참 하고 싶은 말이 많다. 다 하지 못하는 게 아쉬울 따름.


급이 같아야 놀지

예전에 도올 선생이 했던 얘기였다. 급이 같아야 놀지. 나는 이 말을 듣고서 좀 떴다고 건방지게 군다는 식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는 예전부터 대우를 받을 만한 자격이 되는 이들은 대우를 해주는 게 옳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런 이들이 대우를 못 받으면 그런 얘기를 해도 난 그럴 만하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지적 수준이 높은 이들은 선호한다. 지적 수준이 떨어지는 애들이 건방지면 머리에서 비린내 나니까 저리 가서 놀아라는 식이다.

세상을 살다보면 밸런스가 안 맞는 사람이 많다. 물론 완벽한 밸런스를 갖긴 힘들지만 노력은 해야 한다는 의미다. 가진 돈에 비해 교양과 지식이 부족한 속물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특히나 많은데, 돈이 많으면 주변에 파리가 들끓어서 지가 뭐 되는 양 깝죽대는 이들이 많다. 나는 그런 이들을 만나도 별로 주눅 들지가 않는데 왜냐면 내가 그 사람들 돈을 어떻게 할 생각도 없고 그들에게 도움을 받을 꺼리도 없을 뿐더러 그런 꼬락서니를 내가 못 봐주기 때문에 딴 데가서 돈 지랄하라고 한다.

급이 같아야 논다는 건 그만큼 대화가 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대화가 되려면 적어도 지적 수준이 어느 정도 되어야 하는 법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얘기를 해도 상대가 이해할 수준이 못 되니까 그냥 입을 다물고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러면 웃긴 게 상대는 내가 조용하니까 자신의 말이 맞다고 착각한다는 거다. 그래서 상종하기 싫은 거다. 그걸 모른다. 예전에는 그게 답답했는데 지금은 그렇다. 그냥 상종을 말자고.


새로 이해하게 된 중용의 의미

<도올 논어>를 읽고서 철학적 사고를 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 그러면서 서양의 사고방식 매커니즘보다는 동양의 사고방식 매커니즘이 더 우월하다고 느꼈다. 동과 서라고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걸 또 따지고 드는 사람이 있을 지 모르겠지만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부분만 보고 그렇게 얘기를 하면 나 또한 답답할 노릇이다. 그래서 서두에서 급이 같아야 놀지라는 부분을 먼저 언급한 것이고.

좀 지적 수준이 높다 하는 이들 대부분 서양의 사고방식에 찌들어 있다. 그게 한계가 있다는 걸 나름 내 책에서는 보여주려고 노력했는데(2월달에 몇 군데 출판사에 제의한다. ^^;) 이해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이해는 해도 자신이 깨닫지 못하면 실생활에 접목시키기가 힘들 건데. 여튼 이번 책인 <중용 인간의 맛>을 읽으면서 얻은 것 중에 가장 큰 하나가 중용의 의미에 대해서 아직 나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구나 하는 거였다.

가운데를 지칭하는 게 아냐~

우선 중용을 가운데라고 지칭하는 오해가 있었다. 사실 나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 행동 양식에서 그렇게 하려고 했던 건 아니다. 치우침이 있으면 나는 반대로 치우쳐서 전체적인 밸런스를 유지하려고 했을 뿐.(아마 이게 <중용 인간의 맛>에서는 과와 불급이란 표현과 맥락이 같다고 본다.) 그런데 이런 오해는 서양철학에서 온 거라는 거다. 재밌군. 역시 서양철학은 좀 딸린다고 생각하는 내 생각과 일맥상통한다.

용기에 대하여 비겁과 만용이 독자적인 극단항목으로서 실체화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때는 비겁한 듯이 보이는 행동이 용기가 될 수도 있고, 어떤 상황에서는 만용이 위대한 용기의 전범이 될 수도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양 극단을 실체화하고 그것을 악덕이라고 확고하게 규정하며, 동시에 반드시 그 가운데를 따로 지목하고 있다는 것이다. 악덕은 과와 불급에 의존하는 상태이며, 선덕이란 인간의 삶의 감정과 행위에 있어서 중간항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중용 인간의 맛 p58의 일부>


그럼 중용은 뭐냐?

아마 책 읽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쉽게 풀어서 정리하려 하는데 문제는 중용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개념을 명확하게 인지해야할 필요가 있다.

중(中): 희노애락이 아직 발현되지 않은 상태, 천하의 큰 근본
화(和): 그것이 발현되어 상황의 절도에 들어맞는 것, 천하사람들이 달성해야만 할 길


중용이라는 건 위에서 중(中)이라고 한 개념에 속한다고 봐야 한다. 즉 발현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치우칠 수가 없고 근원적인 거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삶을 영위하면서 이러 저러한 상황에서 감정 표현을 하고 선택을 하고 살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발현이 되는 게 화(和)의 개념이다. 고로 중용은 발현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평형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에 발현된 상태의 중간 개념이랑은 개념 자체가 다르다는 거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꼬?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도 안 갈 뿐더러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이해가 안 가면 자신의 지적 수준을 탓할 노릇이라고 얘기하고 싶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한다면 나도 그런 부분을 생각 안 해본 게 아니라고 얘기하고 싶다. 나는 생각 속에서만 맴도는 개똥 철학을 싫어한다. 현실에 접목이 되고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옳은 소리 누가 못해? 그러나 상황에 따라 적절한 얘기를 하는 사람 드물다.

예를 들어 보자. 예전에 블로그를 통해서도 참 많은 논쟁을 일삼던 나였다. 많은 이들이 그렇게 얘기한다. 다양성. 나는 거기에 이런 얘기를 했었다. 다르기 때문에 우열을 가릴 수 있다. 그걸 어떤 이들은 저 사람은 항상 싸움의 논리로만 얘기하려고 한다고 얘기하기도 했었다. 지적 수준이 낮은 이들이라 그렇다. 그러니 내 말을 이해 못하는 거지. 다르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그럼 니 의견도 맞고 내 의견도 맞고 그런 Status로 끝?

그럼 앞으로 나아가지를 못한다. 우리는 매순간 경중을 따지면서 선택을 한다. 그 선택의 대상이 가벼운 것에서부터 무거운 것까지 다양할 뿐이다. 자기 스스로는 그렇게 경중을(위에서는 우열이라는 표현을 했다.) 따지면서 남과 얘기하다 좀 말이 안 된다 싶으면 다양성이라고 치부해버린다. 아주 수준 낮은 이들이 어디서 어줍잖은 소리만 들어서 하는 얘기다. 그래서 나는 그런 이들에게 다른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다르기 때문에 차이가 있다는 걸, 차이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성적인 사고로 무엇이 더 낫다는 걸 가릴 수 있다는 걸 지적하고 싶었던 건데 말이다.

아마 그런 얘기는 처음 들어봤겠지. 신선했을 거이다. 그런 얘기는 얼마든지 해줄 수 있다. 다만 얘기해도 곡해하고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부치니 얘기 하기 싫은 거지. 그러니 급이 되어야 같이 놀아준다는 얘기를 할 수 밖에 없는 거다. 입을 다물고 말이다. 게다가 나는 성격 자체가 다혈질에다가 호락호락하지 않다 보니 상대가 그렇게 대하면 아주 극단적으로 대해주는 나쁜 버릇이 있다. 그래서 피하는 게 상책이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말아야지. 초딩들이 싸우자는데 대꾸해줄 가치가 없는 거다.

여튼 나는 다소 실사구시적인 측면이 강하다는 거다. 그런 나기에 중용이 발현되지 않은 상태라는 범주에서 해석되어야 하는 거라면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꼬 하는 스스로에 대한 질문을 해볼 수 밖에 없는 거다. 이는 마치 예전에 피에르 레비의 <집단지성>을 읽으면서 그 의미를 파악하려고 했던 거와 비슷하다. 무슨 말인고 하니 너무 아이디얼한 생각 아닌가 하는 거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생각만을 위한 생각 말이다.

그러다 <중용 인간의 맛>에서 이런 예시가 봤다. 무엇이 용기냐는 거에 대해서 때로는 비겁한 행동이 용기라고 볼 수도 있고 때로는 만용(분별없이 함부로 날뛰는 용맹)이 용기로 볼 수 있는 상황이 있다는 거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해석을 하고 싶다. 근원적인 거는 변함이 없다. 이는 내가 세상을 살면서 진리라고 생각하는 류의 것들이다. 따라서 진리(여기서는 중용이라 해도 무방)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그것을 발현(현실세계에 접목)하는 데에서는 상황적인 해석이 필요한 법이다. 

나는 대통령 선거에 투표를 할 때도 세상이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있으면 밸런스를 위해서 다른 쪽 극을 선택하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어느 정도 반대로 치우치면 이제는 그 양극이 아닌 다소 중앙에 있는 걸 선택하려고 한다. 그렇게 밸런스를 유지하려고 하는 거다. 마치 시소의 평행 유지를 위해서 말이다. 한쪽이 무거우면 반대쪽에 올라가 무게를 실어주고 어느 정도 올라오면 중앙에서 평행을 유지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중용을 이해해서 그렇게 했던 건 아니다. 물론 <도올선생의 중용강의>를 안 읽었던 게 아니다. 오래 전에 읽었다. 그러나 그 때는 지금과 같이 중용을 이해하지 못했었다.(찾아보니 리뷰는 안 적어뒀었네. 너무 적을 게 많으면 리뷰를 미루다 못 적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 그러나 이런 저런 책을 읽으면서 혼자서 생각을 많이 하다 보니 내 나름대로 나만의 방식으로 그렇게 했던 것인데 그게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중용은 과와 불급의 즉 과함과 모자람에 치우치지 않는 평형 상태인데 세상이 과한 상태라면 거기에서 평형 상태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그게 중앙을 뜻하는 건 아닐 것이다. 앞에서 내가 얘기한 시소를 떠올려보라. 그런 의미로 이해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거다. 적어도 나는 중용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하고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다른 걸 통해서 나는 중용의 의미를 이해하고 현실에 접목시켜왔다고 본다.


내가 강조하는 철학

내 블로그의 글들을 보면 알겠지만(요즈음에는 내 생각을 담은 글이 별로 없다.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나는 철학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철학이라고 해서 뭐 칸트의 정언명법이니 그런 류를 많이 알고 있다는 게 철학적이라고 하는 게 아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 인간 근원에 대한 이해. 그런 이해를 바탕으로 나오는 담론들은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이성을 한층 살찌우고 삶을 살아가는 데에 도움을 준다.

물론 직접적으로 돈을 벌어다 줘서 도움을 주는 건 아니다. 그러나 돈이 안 벌리고 힘든 상황에서도 스스로 현 상황에 대해서 인지를 하고 때를 기다리면서 노력하는 자세를 갖게 해줄 수는 있다. 또한 돈이 많이 벌려도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할 지에 대해서 생각해볼 줄 알고 돈을 잘 쓰게 해주는 지혜를 줄 수도 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현실세계에 도움이라고 하는 게 돈이라는 물질로만 연결을 시키는 거 자체가 이미 철학과는 동떨어진 발상인 거다.

나 또한 돈을 잘 벌고 싶다. 그래도 내가 생각하는 방식이 아닌 방식으로 돈을 벌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사람은 실수를 한다. 내가 생각한 방식이 아닌 방식으로 돈을 벌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내 다시 돌아온다. 왜? 돈만 쫓는 인간이 되지 못하는 나였고 그게 아니라는 걸 느끼면 반성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줄 아는 인간이었기 때문에. 그러나 내가 생각한 방식이 아닌 방식으로 돈을 벌 때도 있다. 그건 상대가 그런 류의 인간이기에 그에 맞게 대응해주는 것일 뿐이다.

철학이라고 해서 어려운 게 아니다. 혼자서 고뇌하고 자신에 대해서 되돌아보면서 반성하고 하는 것도 나는 철학의 하나라고 본다. 스스로 생각할 줄 모르면 철학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다. 뜻하지 않은 상황에서 왜 나는 이런 생각을 가졌을 때 신을 찾지 말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스스로 생각해보길 바란다. 그런다고 답이 나오는 건 아닐지 모르겠지만 그 시간이 매우 값진 시간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 그건 낭비다. 거기에서 내린 답이 정답이 될 순 없기에 또 다른 경험을 하면서 또 더 나은 답을 찾아갈 수 있는 과정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이 좋았던 게

단순히 중용의 의미를 알 수 있어서가 아니라 혼자서 생각하면서 평온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게 좋았다. 스스로 생각하게 해줄 수 있는 책이 가장 좋은 책이다. 많은 책을 읽기 보다는 적은 책이라도 읽으면서 스스로 많은 생각을 해야 하는 게 중요한 법이다. 독서가 중요하다고 하여 책만 디립다 많이 읽는 이들도 꽤나 많던데 난 그네들의 지적 수준이 높다는 걸 느낄 수가 없다. 그냥 책을 많이 읽어서 아는 게 많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이들은 아는 걸 티내려고 한다. 어떤 상황에 대한 해석은 못한다. 그건 지적 수준이 높은 게 아니다. 똑똑한 게 아니라는 거다.

책 많이 읽는 게 자랑은 아니다. 나는 그런 이들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냐면 그 정도의 서적을 읽고 지적 수준이 그 정도면 넌 바보야. 정말 사고력이 떨어지는구나. 하는 그런 생각 든다. 하루에 한 권? 얼마나 할 일이 없으면 하루에 한 권씩 읽을까? 책을 통하지 않고서 배울 수 있는 수많은 것들이 세상에는 천지인데 말이다. 게다가 그네들이 독서하는 패턴을 보면 참 뭐랄까? 이 세상 모든 정보를 다 알려고 하는 백과사전식이다. 그게 자랑 거리인지는 모르겠다만 내공이 높은 이들 눈에는 참 한심하게 비춰진다. 많이 읽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많이 생각하고 생각의 질을 높이는 게 중요하다.

*  *  *

집필하는 게 아니다 보니까 생각 나는 대로 편하게 주저리주저리 떠든 거 같다. 그래도 그렇게 하고 싶을 때가 있다. 책으로 적는다고 한다면 한 문장 한 문장 전후 관계 파악하면서 꼼꼼하게 적겠지만 블로그에다가 그렇게 적으면 하루에 글 하나 적기도 힘들다. 적어도 다른 포스팅과 다르게 이 글은 리뷰지만 내 생각이 많이 들어갔다. 그걸로 족한 거다. 그걸 읽고 이 새끼 왜 이래 생각하면 브라우저 끄면 그만인 것이고 그래도 뭐 하나 얻을 게 있어서 읽으면 그걸로 족한 것이다.

나는 그렇다. 진중권과 같은 사람의 말이나 글을 듣고 읽어보기 좋아한다. 그의 생각이 무조건 맞다는 게 아니다. 때로는 나와는 이견이 있는 경우도 많다. 허나 그의 말이나 글은 듣고 읽어볼 만하다. 왜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 듣고 읽어보면서 배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런 수준이 되어야 한다. 나와 이견이 있다고 이상한 사람이다 그 사람 틀렸다 식이 아니라 이견이되 들어볼 만한 사람의 얘기는 들어보는 게 좋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기에 남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다는 게 아니다. 그냥 들어보라는 거다. 가끔씩 내 생각을 표현할 때면 곡해되는 경우가 많아서 하는 소리다. 그네들이 뭐라 해도 나는 그들이 지적 수준이 높아서 하는 얘기면 들어보겠지만 그게 아니면 수준 낮다고 치부해버린다. 나를 욕하고 말고가 중요한 게 아니다. 들어볼 만한 얘기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지. 그걸 모른다. 마지막으로 ex libris 정리하고 리뷰 마친다.


지금까지 내가 읽었던 도올 선생의 책들


<도올 논어 1>, <도올 논어 2>, <도올 논어 3>, <금강경강해>, <중용강의>, 그리고 이번에 <중용 인간의 맛>. 그런데 리뷰는 두 편 밖에 없다. 꼴랑. 너무 하고 싶은 얘기가 많으면 그렇다. 감히 적을 엄두가 안 난다. 생각을 정리하고 글 하나 적는 게 그렇게 어렵다. 그래서 이 <중용 인간의 맛>리뷰는 그냥 편하게 생각 나는 대로 끄적거렸던 거다. 만약 책으로 내 생각을 정리해서 낸다면 다르겠지만 말이다. 블로그는 그런 데서는 좀 자유로우니까. 누가 뭐랄껀데? 응?


ex libris

01/ 도(道)
도라는 것은 잠시라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도가 만약 떠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02/ 중용과 성
중용을 읽고 중용만을 말하고 성을 말하지 않는 자는 중용을 읽지 않은 것이다.
(나는 중용 얘기하면서 성을 말하지 않았다. 따라서 나는 중용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상관없다. 나는 거기까지는 이해하고 싶지가 않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선에서만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서 내가 살아가는 데에 도움이 되면 된다. 이런 저런 책을 읽고 또 경험이 쌓이다 보면 나중에는 또 이해를 할 수 있는 때가 있으려니 편하게 생각한다. ^^;)

03/ 인생의 궁극적 목적 by 아리스토텔레스
궁극적 목적이란 그것이 다른 무엇의 수단이 될 수 없다는 뜻의 궁극성과, 더이상 아무것도 보탤 필요가 없는 자족함이라는 뜻의 완전성의 두 측면을 모두 갖추어야 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이 두 가지 성질을 갖춘 그 궁극적 목적을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있는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행복해지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04/ 서구적 인간과의 특징
인간을 일단 부정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일간을 애초로부터 불완전한 존재로 규정하려는 것이다. 즉 그들은 인간의 정면을 바라보지 않고 부면을 바라보는 것이다. 태양 아래 빛나는 푸른 모습만 바라봐도 언어가 딸릴 판에 그들은 그늘만 쑤시고 다니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그렇게 인간을 바라보아야만 종교적 권위를 장악한 제사장 그리고 권력계급들이 장사를 해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을 욕망의 주체로만 바라보는 생물학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과학이라는 종교의 장사를 잘 해먹기 위해서는 그런 부정적 인간관을 객관이라는 이름하에 위장해야 한다.

05/ 대의
대의란 나의 존재 가치를 인간세의 보편적 가치로서 실천적으로 공유하는 것이다. 나의 생명가치라는 것은 도덕적 실천에 내재하는 것이다.

06/ 프리모던, 모던, 포스트모던
인간은 과연 근대적이어야만 하는가? 인간의 역사는 반드시 서양사가 말하는 근대를 구현해야만 하는가? 도무지 이런 문제가 나에게는 답변할 가치조차 없는 케케묵은 오치의 오류로서만 느껴진다. 내가 지금 여기 서울에서 잘 살고 있으면 됐지, 왜 내가 근대적으로 살아야만 하는가? 잘 사는 게 무엇이냐?만 논의하면 됐지, 왜 모던, 프리모던, 포스트모던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누가 길거리를 지나가는데 어떤 사람이 갑자기 이렇게 묻는다면 어떨까? "너 요즈음도 마누라 패냐?" 만약 이 사람이 평소에 항상 마누라를 패던 사람이라면 모르되, 근본적으로 마누라를 팬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질문에 대답할 수가 없다. "예스 앤 노"가 근원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서양에서의 모던이란 프리모던이 있기 때문에만 가능한 언사이다. 그런데 프리모던이란 반드시 이성보다는 계시를 중시하고, 합리적 사유보다는 비합리적 사유를, 개인의 자유의지보다는 신에게의 복속을 높게 평가하던 종교적 가치와 결부되어 있다. 이런 종교가 없던 사람들에게 모던이란 전혀 무의미한 언어일 수도 있다.

중용 인간의 맛
도올 김용옥 지음/통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