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3,173번째 영화. 2011년 제68회 베니스영화제 남우주연상(마이클 패스벤더)을 안겨준 작품이다. 2011년도작인데 국내에서는 올해 3월에 개봉 예정되어 있다는. 이미 영화 매니아들은 많이 봤을 끼고만. 잔잔해서 이런 류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닥 추천하지는 않는다. NC-17 등급으로 노출도가 꽤 있는 영화지만 이에 대해서는 좀 있다 얘기해줄테니 노출이란 말에 혹 해서 보고 그러면 낭패를 볼 수도 있다. ^^; 노출도는 좀 있으되 이 영화는 잔잔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영화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의미를 읽어내는 게 그리 난해한 영화는 아니고, 스토리가 지루하지는 않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좋아할 만한 스토리는 아니지 않나 싶다. 어찌 보면 이런 영화는 혼자 조용히 보는 게 가장 이상적일 듯 싶고 말이다. 그래서 개인 평점은 7점 준다. 내 개인 평점은 나름 내 눈으로 보는 대중들의 수준을 고려한 평점이다. 8점 이상이 되어야 추천이라고 하니 추천하기는 좀 애매해서 7점인 거다.
※ 스포일러 안 적는 나인데 이 리뷰는 스포일러가 있다. 감안하고 보길. ^^;
19금 영화? 노출 수위가 어떻게 되길래?
이 작품 NC-17 등급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19금 영화 되겠다. 미국 기준으로 17세 이하 관람 불가고. 왜? 노출 때문인 듯. 그럼 노출 수위가 어떻게 되길래? 주인공 마이클 패스벤더 아랫도리 그대로 나온다. 거기서 나오는 오줌 줄기도 볼 수 있다. 뒷모습으로 나오긴 하지만. ^^; 마이클 패스벤더의 여성 팬이라고 한다면 이 영화 강추다. ㅋㅋ 오~ 크다. 물건이다. ^^; 그럼 남자 것만 나오나? 그렇다. 여자는 서 있으면 안 보이잖아~ 그래서 가슴과 아래쪽 털 정도만 나온다. 이 정도 수위다. 그 이상 안 나온다. 월렘 데포와 샤를로뜨 갱스부르 주연의 <안티크라이스트>와 같은 영화에 비하면 이건 뭐 노출 수위가 한참 낮다. 그래서 비록 NC-17 등급이긴 하지만 <셰임>은 노출이 주가 아니라 주인공의 일상을 통해 뭔가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게 중요한데 단지 마이클 패스벤더의 거시기가 팬 서비스로 나온다 정도 생각하면 되겠다. 아~ 부럽. 왜? 크다. ^^; 아 그리고 동성애(남자와 남자)도 나오고(아주 살짝이지만), 쓰리썸(남자와 여자 둘)도 나온다.
전라의 연기, 베니스영화제 남우주연상, 마이클 패스벤더
잘 생기지 않았나? 웃을 때 얼핏 보면 약간 이완 맥그리거 닮은 부분도 없지 않은데(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 이완 맥그리거보다 훨씬 잘 생기고 또 매력 있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인지라 필모그래피를 확인해보니 <프로메테우스>의 주인공이었다. 아. <프로메테우스 2> 2014년도 또는 2015년도에 공개될 예정. 이미 제작은 확정되었으니. <프로메테우스 2>에서도 역시나 마이클 패스벤더가 주인공이다. 독일 배우인데 꽤 멋스럽고 남성적인 매력이 풍기는 마스크다. 나도 이런 스타일의 남자가 좋아. 독일 배우라서 그런지 나찌 군복 입혀도 잘 어울릴 거 같다는. 계급은 대령? 뭐 그 정도. ^^;
진정성이 결여된 관계 속의 도시인
<셰임>의 주인공(마이클 패스벤더)은 뉴욕이란 대도시에 버젓한 직장을 갖고 있고 아파트 한 채를 소유한 도시인이다. 회사에서도 성인물을 보고, 집에서는 성인 화상 채팅을 하며, 심심하면 딸잡기 일쑤고(자신의 컴퓨터 수리 맡겨서 일을 못하니 회사 화장실에서도 한다. 헐~ 중독자니? 응?), 그러다 성에 안 차면 콜걸을 집에 불러들인다. 직장 동료들끼리 술 마시러 가서는 여자 꼬셔서 원나잇도 하고. 글쎄 이게 서양 문화권에서는 일상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동양 문화권 적어도 유교 문화의 잔재가 남은 우리나라에서는 조금 거리가 멀지 않나 싶다. 뭐 요즈음 20대들의 클럽 문화는 그런 거 갖진 않다만.
그래도 서울에서 대학 나와서 대기업 다니면서 혼자 사는 직장인들을 생각해보면 비스무리한 면이 없진 않다. 대학 졸업하고 여자들은 꾸미는 데에 돈이 가장 많이 들어가고 남자들은 본능을 충족시키는 데에 돈이 가장 많이 들어간다 하지 않는가? 다만 <셰임>에서와 같이 술집에서 여자 꼬시는 게 아니라 회사 동료들끼리 룸 다니는 식? 그렇게 바꿔서 보면 될 듯. 그러나 자기 친동생이 샤워하는데 들어가서 나체의 동생을 보고서 바로 나가지 않는 그런 장면들은 사실 우리네 문화권에서는 익숙하다 할 순 없겠지. 이 때 여주인공의 신체가 노출된다. ^^;
여튼 <셰임>에서는 뉴욕이라는 대도시에서 생활하는 한 독신 남자를 통해서 진정성이 결여된 관계 속에 사는 도시인들을 꼬집고 있다. 비판하고 있는 건 아니다. 아주 조용히 살짝 꼬집고 있다. 이런 의미는 영화 곳곳에서 느낄 수 있는데 그 중에 핵심이 될 만한 걸 얘기하자면 여주인공(남주인공의 친동생으로 나온다)이 자살하기 전에(죽진 않는다) 남주인공에게 남긴 메시지다.
우린 나쁜 사람이 아니잖아. 우린 단지 나쁜 장소에 왔을 뿐이잖아.
여주인공의 말을 빌어서 얘기하자면 우리들이 나쁜 게 아니라 그런 환경 속에 있다 보니 그렇게 된 게 아니냐는 거다. <셰임>의 배경이 뉴욕이란 대도시라는 걸 감안해서 보면 결국 그런 환경은 바로 도시라는 거고 도시에 사는 도시인들이 나쁘다기 보다는 그런 환경이 결국 그렇게 만든다고 얘기하는 듯 보인다. 그렇다고 다 그런 사람들만 나오는 건 아니다. 진지한 만남이 필요할 거 같다고 했던 회사 동료(흑인 여성)와 뷰 좋은 호텔(?)에서 낮에 한바탕하려고 했던 주인공은 실패한다. 여자가 거부해서? 아니다. 하려고 했는데 주인공이 진행을 못하고 만다. 회사 여동료는 괜찮다고 얘기하고 그냥 가지만 그 호텔방에 남아서 주인공은 콜걸을 부른다. 근데 콜걸과는 신나게 한다.
이런 걸 보면 주인공은 진정성이 결여된 관계에 익숙해진 도시인들의 대표격인 듯 설정된 거 같다. 또한 주인공의 친동생으로 나오는 여주인공은 주인공이 사는 아파트에 왔을 때만 해도 진정한 사랑을 갈구하면서 어떤 남자에게 사랑한다고 얘기하는데 주인공의 직장 상사와 만난지 얼마 안 되어 잠자리를 가진다. 그걸 보는 주인공은 자기 방에서 직장 상사와 친동생을 그냥 놔두고. 왜? 직장 상사라서. 헐~ 우리나라같으면 난리 났을 법한데. 이렇게 다소 과장되게 그린 면도 분명 있지만 여기서 여주인공도 원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뉴욕이란 대도시에 와서 그랬던 거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너무 내가 짜맞추는 건가? ㅋㅋ
과연 남주인공은 진정성을 갖고 관계를 갖게 될 것인가?
친동생한테 화장실에서 딸잡다 들키고 난 후의 주인공은 갖고 있던 각종 성인물과 도구들, 심지어 성인 화상 채팅할 때 쓰던 노트북까지 다 버린다. 그 다음 날, 회사 동료에게 회사 내에서 과감하게 키스를 하고(남들 안 보이는 데서) 전망 좋은 호텔로 갔는데 잠자리에는 실패한다. 그리고 그 날 집에서 여동생과 다툰 후에 집을 나와 술집에서 남친이 있는 여자에게 음담 패설로 꼬시려다가(근데 신기한 거는 그 여자 그 얘기에 흠뻑 빠져든다는 거. 헐~) 그 남친한테 맞고, 동성애를 하고 여자 두 명이랑 쓰리썸도 한다. 그 때 여동생은 애타게 오빠를 찾고 있고. 전화를 안 받아줘서 자살한 걸로 나온다. 맥락상. 물론 여동생을 발견해서 목숨을 건지게 해준 게 오빠(주인공)이지만. 그리고 빗속에서 울면서 후회하는 장면이 나온다.
마지막 장면. 이게 해석이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되는 장면인데 영화 도입부에서도 나오는 장면을 떠올리면서 봐야할 부분이다. 도입부에서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는 길에 반대쪽에 앉아 있는 어떤 여자한테 눈길이 간다. 웃긴 게 그 여자도 주인공을 바라보면서 눈길을 흘리고. 그래서 주인공 여자가 내리는 역에 같이 따라 내려서 쫓아가다가 놓친다. 역에서 내릴 때 카메라는 그 여자의 손을 보여준다. 네번째 손가락에 있는 반지. 유부녀라는 얘기다. 다시 마지막. 여느 때와 같이 출근길 지하철 안이다. 도입부에 나왔던 그 여자를 다시 보게 된다. 희한한 게 그 여자 다시 눈길을 흘린다. 꼬리치는 게 아니면 왜 그렇게 눈길을 흘리고 다니냐고? 엉? 그리고 그 여자 내리는 장면에서 다시 그 여자의 손을 보여준다. 결혼반지. 그리고 장면이 전환되어 그 여자를 쳐다보는 주인공을 보여준다. 이게 마지막 장면이다. 과연 주인공은 그 여자를 따라 다시 내릴 것인가? 아니면 그냥 보낼 것인가?
묘한 여운을 남기는 마지막 장면인데 나는 그냥 보낼 거라고 본다. 일전에 여동생한테 걸렸을 때 성인물을 버린 거는 뭔가 변화를 하겠다는 데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잠시나마 자기 아파트에 머무르는 여동생한테 쪽팔리니까 홧김에 비롯된 거라 본다. 그러다 보니 그 날 회사 동료와 전망 좋은 호텔에서 잠자리를 하려고 했는데도 안 됐던 거다. 회사 동료는 진지한 만남을 바라는 여자였고, 주인공은 그런 관계가 익숙하지 않았기에 그랬던 거고.(근데 너무 밝히신다. 우리 주인공. 도대체 하루에 몇 번을? ㅋㅋ) 그래서 회사 동료를 보내고 난 다음에 콜걸과는 신나게 했던 거고. 그러나 마지막 장면 즉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기 전날 주인공에게는 변화의 계기가 있었다.
바로 여주인공 즉 주인공의 친동생의 자살 현장 목격이다. 가까스로 병원에 옮겨서 목숨은 건졌지만 지난 세월 여주인공이 수없이 시도했던 자살의 흔적(손목에 있던)을 보면서 나름 많은 생각을 했을 거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비를 맞으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공터에서 머리를 쥐어 뜯으면서 주저 앉아서 우는 장면에서 주인공은 느꼈을 것이다. 뭘? 공허함을. 주인공은 동생이 자살하기 전에 제발 자신의 인생에서 사라져달라고. 필요없다고 하면서 나가라고 했다. 그러나 정작 밖에서 동성애와 쓰리썸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에서 난 자살 사고를 보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동생에게 연락을 하고 집으로 뛰어간다. 동생이 없다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동생이 없다면? 진정성이 없는 관계에서 비롯되는 공허함이라는 걸 주인공은 느꼈을 거라 본다.
고로 마지막 장면에서 눈길을 흘려주시는 그녀를 쫓아가지 않았다고 보는 게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반성을 하고 변하려고 해석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겠냐는 거다. 물론 이렇게 해석하지 않고 이 남자는 안 변해~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해석하는 거 보다는 이왕이면 좋게 해석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영화의 제목은 <셰임>이다. 영문으로 Shame. 수치심. 영화의 제목에서 감독은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거 같다. 부끄러운 줄 알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