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아카데미 수상작 훑기 세번째 영화는 <위플래쉬>다.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 음향믹싱상, 편집상 총 3개 부문을 수상한 작품으로 아직도 일부 영화관에서 상영되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의 박스오피스 통계 자료를 보니 현재까지 누적 관객수는 150만명을 조금 넘는 정도로 생각보다는 많이 보지 않은 듯. 혹시라도 <위플래쉬>를 안 봤다면, 이 영화 포스터를 보고서 어떤 스토리의 영화일지 생각해보자. 아마도 대부분 음악 영화인데, 포스터에 '전율'이란 단어가 보이니 음악으로 감동을 주는 그런 영화라고 생각하기 쉬울 거다.
뭐 음악 영화라는 거에 대해선 크게 이의는 없다. (필자는 음악 영화라기 보다는 연주를 소재로 한 영화라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싶지만.) 그러나 음악으로 감동을 주는 게 아니라 두 명(선생과 제자)의 독특한 캐릭터의 갈등과 해소에서 전율을 느끼게 한다. 그 중심에는 드럼 연주가 있었다는 것. 인터넷에 보면 <위플래쉬>의 명장면이라 하여 떠도는 영상들이 꽤나 보이지만, 그 명장면만 본다 한들 선생과 제자의 갈등을 죽 지켜본 이들이 느끼는 해소와 앞뒤 다 잘라먹고 해소의 장면만 본 이들의 감흥은 다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 코너 특성상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으니,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읽어보시길 권함.
캐릭터 Character
① 선생 플렛처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게 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그러나 <위플래쉬>의 플렛처 선생에겐 어림도 없는 소리다. 사소한 실수를 했을 때, "괜찮아. 다음에는 더 잘 할 거야."라는 격려의 한 마디가 힘이 될 법도 한데, 플렛처 선생에겐 용납이 안 된다. 자기의 높은 기준에 맞추지 못하면, 소리치는 것도 모자라 물건을 던지기까지 한다. 뭐 이런 또라이 같은 선생이 다 있나, 괴팍하다 생각할 수 있을 지는 몰라도 우리가 좋아했던 스티브 잡스도 그런 류의 인간이었다.
그래도 어떤 상황에서도 굽히지 않고 초지일관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는 건 그만큼 자기만의 색깔이 강하다는 걸 말한다. 비록 인간적으로는 재수가 없을 지언정 그가 자부심을 갖는 음악에서는 결코 사소한 실수 하나도 용서치 않는완벽주의자였기에 그는 지휘자로서 명성을 날리고 최고의 팀을 이끌 수 있었다. 뭐든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게 있는 거 아니겠는가. 그런 그에게 만만치 않은 상대가 등장했으니 그가 바로 주인공 앤드류다. 참고로 필자는 <위플래쉬>의 주연은 선생과 제자 두 명이라 생각하지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J.K. 시몬스가 남우조연상을 받은 걸 보니 선생 역은 조연인가 보다.
② 제자 앤드류
처음에야 플렛처 선생의 괴팍한 가르침도 감내하면서 견뎌냈던 앤드류. 그러나 그도 일반적이진 않은 제자였다. 물론 플렛처 선생이 하는 걸 보면, 앤드류의 행동이 이해 안 가는 건 아니지만 그런 상황에 처한다고 해서 앤드류처럼 하는 경우는 드무니까. 그만큼 앤드류는 드럼을 잘 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기 때문에 그랬지 않나 싶다. 드럼을 위해 사귀던 여자 친구한테 이별을 통보하고(보통 이런 걸 남자는 멋이라고 착각하곤 한다.) 더블 타임 스윙(일반 연주의 2배 속도로 연주하는 것)을 위해 손에 피가 나도 계속 연습하고, 어렵게 따낸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자동차 사고가 나도 연주하러 달려간다.
처음에는 집념이라고 보였던 부분이 플렛처 선생의 괴팍한 가르침 덕분인지 집착으로 변하게 되면서 결국 둘의 갈등은 점점 고조된다. 그러나 그것이 집념이든 집착이든 그런 거 없이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는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흔히들 "나는 노력했다"라곤 하지만 자기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하는 노력은 누구나 하는 그런 노력이고, 자기가 하고 싶은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올인했을 때야 비로소 진정한 노력이라 생각하는 필자기에 앤드류의 그런 모습이 꼭 나쁘게만은 보이지 않는다.
③ 갈등과 해소
둘의 갈등은 어찌보면 한 사람의 문제라기 보다는 두 사람 모두의 문제다. 선생이 괴팍하기에 그렇다라고 하기에는 제자 또한 만만치가 않다. 둘 다 기질로 따지면 우울질인 듯. 그로 인해 점점 갈등의 골은 깊어만 가고, 급기야 제자는 드럼 연주를 그만하게 되고, 선생은 자신이 가르치던 학교에서 짤리게 된다. (짤리게 된 원인 또한 제자가 제공했다.) 그리고 둘의 재회. 이제는 뭔가 해소가 되는 듯 싶었으나, 너 때문에 내가 학교를 짤리게 되었으니 너도 한 번 엿먹어봐라는 심정으로 상황을 만든 플렛처 선생 덕분에 갈등은 다시 고조된다.
플렛처 선생의 농락에 당할 수 밖에 없었던 앤드류지만 그 상황에서 나도 이대로 그만둘 수는 없다고 배짱 좋게 맞대응하니 갈등은 다시 최고조에 이르고, 그 갈등의 최고점에서 그 둘은 음악으로 통(通)하게 되니 정말 아이러니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위플래쉬>가 우리에게 선사해주는 '전율'이다. 상극(相極)인 두 캐릭터가 극(極)에 이르니 합일(合一)이 되는. 이는 마치 계속 지고 있다가 막판 뒤집기로 역전승을 거두는 짜릿함과도 비슷하리라. 이렇게 얘기한다고 해서 누가 이겼다는 게 아니다. 둘 다 승리를 했으니 더 멋지지 않은가.
그래서 <위플래쉬>를 얘기할 때 캐릭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거다. 이 캐릭터가 어떻다라는 건 사실 <위플래쉬>에서는 중요치 않다. 괴팍하든 어떻든 그런 캐릭터의 설정으로 인해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고, 또 해소까지 되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위플래쉬>를 단순히 음악 영화로만 치부하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있는 거다. 음악을 매개로 했지만 사실 중요한 건 음악이 아니라 선생과 제자의 캐릭터였으니까.
음악과 배우 Music & Actor
① 위플래쉬
영화의 제목 '위플래쉬(Whiplash)'는 채찍질이란 뜻이다. 플렛처 선생의 캐릭터와 잘 들어맞는 단어인데, 영화 속에서 연주하는 곡 또한 '위플래쉬'다. 짜맞춰놓은 양 아구가 딱딱 들어맞는다. '위플래쉬'란 연주곡은 영화를 위해 만든 곡이 아니라 원래 있는 곡이다. 원곡은 행크 레비가 만들었고, 그가 이끌던 행크 레비 레거시 밴드(The Hank Levy Legacy Band)가 연주했다.
② 음악과의 연관성
재밌는 사실들이 있다. 우선 다미엔 차젤레(Damien Chazelle) 감독은 고등학교 시절에 재즈 드럼을 친 적이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가 바로 <위플래쉬>다. 플렛처 선생 역의 J.K. 시몬스(J.K. Simmons) 아버지는 몬태나 대학교(University of Montana) 음악 스쿨의 감독이었으며, 시몬스도 몬태나 대학교 음대를 졸업했다. 게다가 제자 앤드류 역의 마일즈 텔러는 15살 때부터 드럼을 연주하여 영화 속에서의 드럼 연주 80%를 직접 소화했다. 음악 영화라서 그런지 참여한 주요 인물들 모두 음악과 관계가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③ 더블 타임 스윙
영화 속에 나왔던 드럼 기술. 더블 타임 스윙(Double Time Swing). 스윙 그러니까 드럼 연주를, 더블 타임 즉 2배로 하라는 뜻으로, 2배속 연주라 이해하면 된다. 영화 속에서는 400bpm 속도를 플렛처 선생이 얘기하는데, 이 말은 1분에 400번을 치라는 얘기다. (bpm=beats per minuste) 1초에 6.67번 꼴. 물론 1초는 그럴 수 있겠지. 아니 10초는 그럴 수 있겠지. 그러나 1분동안 계속 그런 템포를 유지하는 건 쉽지 않을 거다. 게다가 400번만 치면 되는 게 아니라 일정한 템포 즉 속도로 쳐야 한다는 것. 영화 속에서 내 템포에 맞춰라고 윽박지르는 플렛처 선생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될 듯.
영화 위플래쉬 Movie Whiplash
원래 <위플래쉬>는 단편 영화였다. 제작비가 없었던 젊은 다미엔 차젤레 감독은 우선 <위플래쉬>의 주요 장면만을 담은 18분짜리 단편 영화를 만들어서 2013 선댄스 영화제에 출품한다. 이 단편 영화에서 플렛처 선생은 J.K. 시몬스가 맡았지만 앤드류 역은 마일즈 텔러가 아닌 조니 시몬스(Johnny Simmons)가 맡았다. (조니 시몬스는 <해리 포터> 시리즈의 히로인 엠마 톰슨과의 열애로 국내에도 알려진 배우다.) 2013 선댄스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단편 영화 <위플래쉬>는 이후 Bold Film에서 330만 달러(35억 정도)의 투자를 유치한다. 이 투자금으로 하루 14시간씩 촬영하여 단 19일 만에 찍은 영화가 <위플래쉬>다. 참고로 감독의 나이는 28살이다.
예고편 Trailer
필자의 3,465번째 영화로 개인 평점은 8점.
- 이 글은 스티코 매거진(http://stiblish.co.kr)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