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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5살. 내 인생의 첫 매스컴 나들이

* 이 글을 기존 홈페이지에서 옮기기 위해 필요한 사진들(기존 홈페이지에는 글만 있었다.)을 스캔하는 것만 27장. 스캔한 것을 보관용과 웹용으로 바꾸는 것으로도 이 글에는 정성이 들어가 있다. ^^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부산 집에 있는 내 앨범(동생 앨범은 빨간색 내 앨범은 파란색이다.)을 보면 맨 앞에 돌 사진이 있고 그 옆에 보면 신문 한 면이 있다. 신문에 난 기사를 보면 MBC 배 세 발 자전거 대회에 대한 기사였었고 난 그런 일이 있었다고만 들었을 뿐 사실 그것에 대한 자세한 기억은 없다.

신문에는 난 단상(1등,2등,3등 올라가는 곳)에는 없고 그 다음 줄에 있다. 4세부부터 상을 줬는지 아니면 6세부부터 시상을 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어쨌든 단상에는 그 다음으로 올라갔었나 보다. 하여간 난 5세부에서 1위였고 다음에 상 받을 차례였었기에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신문에는 얼굴 반만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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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분명 신문에서 내 얼굴이 나왔다. 이것 또한 내 인생에서 처음 신문 지상에 내 얼굴을 알린 최초의 사건이었다. 물론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우연찮게 신문에 내 얼굴이 노출될 수도 있다.(예를 들면 자료 화면에 말이다. ^^) 신문에 나왔다는 것에 의의를 둘 뿐 그 기사에는 내 이름 석자도 나오지 않는다. 내가 단상에 올라가 있었다면 내 이름이 올라가겠지만 신문에서는 짧게 이런 식으로 적혀 있었다.

"영광의 순간 최경주"

내가 올라갔을 때만 찍혔어도 정말 아까운 순간이었다. 적어도 내 이름 석자를 신문에 남길 수가 있었는데... 내가 스팟라이트를 받은 기사는 아니지만 일단 내 얼굴만큼은 확실하게 나온다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그 때 내 나이 5살이었다.

자전거 대회 자체가 MBC 배였고 전국 대회였기 때문에 생중계를 했었다. 이것은 내가 사진을 보면 안다. 그 당시에 중계를 했던 이쁜 아나운서와 조폭과 같이 생긴 남자 아나운서와 함께 있는 사진에서는 아버지가 나를 안고 인터뷰에 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가 바로 내가 세상에서 처음 TV 에 출연하는 날이었던 것이다. 지방방송이고 낮이긴 했지만(우리가 흔히 평일에 낮에 하는 스포츠는 비인기 종목이라 잘 보지 않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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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그런 세발 자전거 대회를 그것도 낮에 누가 보겠냐 싶다. 수영 대회 같은 거라고 해도 관심 있지 않은 사람은 낮에 TV 를 켜서 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난 분명 공중파를 통해서 내 얼굴을 만천하에 알렸다.(사실 부산에만) 그것은 사실이다. 그것에만 의의를 둔다. 하하하

MBC 세발 자전거 대회에서 딱 하나 기억 나는 것이 있다. 아마도 결승전이 아니었나 싶다. 그 이전에 예선전은 어떻게 치루고 올라갔는지 일일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금 수십년 전의 일을 생각한다고 해도 그것이 쉽게 생각날 리가 없다. 허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내 머리 속 저편에 한 가지 남아 있는 추억 아마도 결승전일 지 싶은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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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스타트시의 모습이다. 스타트는 항상 거의 꼴지 수준이지만 막판 스퍼트가 강해서 항상 1등으로 골인을 했다. 난 사진 오른쪽에서 세번째.

스타트 라인에서 탕 소리가 나면 그 때부터 세 발 자전거를 굴려야 한다. 뒤를 돌아보기에는 너무나 시간이 촉박하다. 10여명이 경쟁하는 그 라인에서 내 옆 아니면 좀 더 빨리 앞서 있는 상대자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어렴풋이 3등 정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1등 해야지 하는 오기. 어릴 때 부터 나는 그런 데에 굉장히 집착을 했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관성의 법칙으로 내가 발을 굴려 자전거를 굴러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전거 패달이 돌아가서 내 발이 붙어 있는 느낌 그 느낌으로 달렸다. 간발의 차이인 것으로 생각한다.

100m 육상 경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끝에서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가 가장 먼저 들어온 사람을 1등이라고 지정해 주는 것이 전부였다. 내가 골인하고 나자 내 앞에 서 있던 등수 세는 여자 나를 번쩍 들어올린다. 난 그게 싫었다. 예선전부터 항상 골인 지점 가면 번쩍 들어올렸던 것이다. 어쨌든 이겼다. 승부의 세계에서 승리라는 것은 어릴 때도 달콤했다.

결국 1등을 했고 그래서 내가 상품으로 받은 것이 메달과 함께 보르네오 책상이었다. 5살이 받기에는 부담스러운 상품이었고 처음에는 아버지가 공인중개사 시험 보신다고 쓰시고 다음에는 내가 그리고 그 다음에는 동생이 쓰는 24년된 책상은 아직도 고향집 작은방에 있다. (최근에 이사하면서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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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모님은 여기에 맛을 들이셨는지 다른 세발 자전거 대회에도 출전을 시키신 모양이다. 내가 기억하기로 전국 대회가 아니었다. 훨씬 작은 대회였던 것 같은데 그것은 방송을 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냥 하던 대회였던 것 같다. 거기서는 내가 기억하기로 3등을 했던 것 같다. 물론 같은 나이 또래에서 말이다. 그 때는 트로피와 무엇을 받았던 거 같은데 기억에 없다. 뭔가 분명 받았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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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5살 지금으로 부터 24년 전. 1981년 나 이승건이 처음으로 공중파를 타던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