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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자, 사주 그런 거에 대해서 어느 정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는 이가 아니라면 팔자니 운명이니 하는 얘기에 우습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 그런 이에게 운명이라는 거에 대해서 팔자나 사주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반박을 못해서가 아니라 그냥 하고 싶지 않아서 안 하는 거다. 내 지인들 중에 궁금한 이들이 있으면 얘기해주곤 하지. 나도 얘기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여튼.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유비는 자기 팔자의 극을(좋은 쪽으로) 달렸던 인물인 거 같다.
#1
유비가 인의군자처럼 보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명확하다. 좆도 할 줄 아는 게 없다. 문이든 무든. 그러니 자기보다 강한 상대 앞에 고개를 수그릴 수 밖에 없었지. 그러나 내가 이렇게 얘기한다고 해서 유비가 완전 쉣이다 그런 얘기는 아니다. 그닥 뛰어난 인물은 아니지만 인의가 없진 않았으니(이 또한 절대적인 관점이 아니라 당대의 다른 주군들과 비교했을 때라고 봐야하겠지.).
#2
조조와 같은 경우는 참 뛰어난 인물이다. 유비와 비할 바가 안 된다. 그런데 유비를 이기지 못하는 이유는 유비 주변에 좋은 장수와 책사가 많아서다. 조조 주변에 그런 인물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조조 자체가 뛰어나기 때문에 조조의 판단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걸 보면서 내가 느낀 바. 최근에 지인한테도 얘기했지만. 내 편의 얘기는 그 사람이 개인의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 게 아닌 이상은 잘 들어봐야 한다는 것. 그 사람이 아무리 나보다 뛰어나지 않다 하더라도 말이다. 왜냐면 그게 다 우리 잘 되라고 하는 얘기니. 물론 조조와 같은 경우는 맞는 말에는 수긍할 줄 알았고, 인재를 중요시했던 인물이니까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거지만.
#3
중국이라는 나라가 넓어서 그런지 삼국지를 보면 참 뛰어난 장수, 책사들 많다. 다만 삼국지연의에서는 오나라를 다소 평가절하한 듯한 느낌. 어찌보면 오나라만큼 뛰어난 인재가 대물림되는 경우는 다른 나라에서 보기 힘든 부분이 아닌가 싶다. 손견, 손책, 손권. 주유, 노숙, 육손.
위나라를 보면 조조가 죽고 난 다음에 황제가 된 조비는 그리 뛰어나지 않았다. 나는 <삼국지> 중국 드라마 보면서 조비를 맡은 배우가 참 조비 역을 잘 했다고 보는데 그 이유는 생긴 것도 쪼잔하게 생겼고, 조조 살아 생전에는 비리비리하다가 황제가 되고 난 다음에는 뭐 되는 양 보이는 모습이 실제 조비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촉나라 유비도 매한가지. 유비 죽고 유선. 얘는 더 심하지. 그러나 오는 안 그렇다. 그래서 나는 오나라가 평가절하된 듯 느껴지는 거고.
#4
삼국지연의에서 유비를 너무 군자로 그렸기에 마지막 한 번의 판단 미스로 죽음에 이르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렇게 군자가 왜 그렇게 실수를 하는가. 인간이기에 실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원래 그런 인간은 아니었다고 보는 게 더 그럴 듯한 해석이라 본다. 당대의 다른 인물에 비해서 인의를 중요시하게 생각하기는 했지만 가진 게 없고, 그렇다고 뛰어난 능력을 가진 게 아니니까 자기가 뭔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남을 활용할 수 밖에 없었던 거다. 그러다 자신이 뜻하는 바를 어느 정도 이루고 나니 상황이 달라진 거지. 그러니까 그런 걸 보면 원래 군자와 같은 그런 사람이 실수를 했다기 보다는 원래는 군자같은 사람이 아니지만 자신이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했던 거라 보는 게 더 그럴 듯하다고 본다.
#5
개인적으로 리더십을 얘기할 때, 유비는 내가 언급하지 않는다. 개인 성향이 그러하기도 하지만 사실 까놓고 보면 별로 배울 게 없어. 그렇게 고개를 수그려야 한다는 거? 그럴려면 자신이 똑똑하지도 않아야 하고, 전쟁에 능하지도 않아야 한다. 즉 별 볼 일 없는 이가 두각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고개를 수그리면서 큰 뜻을 자신있게 보여주는 식이 되어야 한다는 거다. 한마디로 구라 잘 치라는 얘기. 내 주변에 그런 이 없는 거 아니다. 있다. 역시나 뭔가를 이루고 나서는 돌변.
#6
<삼국지>에서는 제갈량도 과장되게 표현했지만 뛰어난 건 사실이다. 그것도 상당히. 내가 보는 <삼국지>에 보면 적벽대전에서 제갈량이 기문둔갑술을 쓴다고 되어 있는데, 내가 공부했었던 게 바로 기문둔갑이었다.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동풍을 불게 하는 그런 거는 다 구라라고 보면 되고. 어찌 인간이. 말도 안 되는 얘기고. 소설이니까 그런 거라 생각하면 된다. 허구가 많긴 해도 뛰어난 건 사실이니까. 나는 똑똑한 사람을 좋아하다 보니 왜 유비 같은 이를 만나 재능을 그렇게 만드나 싶기도 하지만 예전에 내가 언급했듯 제갈량이 그럼 조조 밑에 있을까? 조조 본인이 똑똑한데 말이지. 별로 빛을 발하지는 못했을 거다. 즉 유비 밑에 있음으로 해서 자신의 재능을 맘껏 발휘할 수 있었던 거기에 서로 맞아 떨어진 게지.
#7
중국 드라마 <삼국지>를 보면서 관우, 장비가 죽을 때는 그래도 안타까웠는데, 유비가 죽을 때는 전혀. 오히려 "너는 니 팔자, 운명보다도 더 잘 살다 가는 거잖아. 니가 니 능력으로 그렇게 될 수는 없었을텐데. 왜 괜히 지 생각대로 하다가 대패하냐. 죽어도 싸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정작 비열한 여포가 죽을 때는 초선 때문에라도 그래도 저렇게 죽는다면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기라도 하던데 유비의 죽음에는 전혀. 전혀. 일말의 감정도 안 생기고 잘 됐다 싶은 생각마저 드니. 정말 나는 유비란 캐릭터를 싫어하는 모양이다. 졸라 혼자서 깨끗한 척 하면서(실제로는 아닌데) 실력은 좆도 없는 인물이라 생각하기에.
#8
그래도 삼국지를 다시 보니 이런 저런 생각 많이 든다. 아마 손자병법이나 대망을 다시 봐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나이 들어서 보니 정말 다른 시각에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되네. 물론 그런 생각들이 앞으로의 내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 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거. 그건 그냥 먹는 게 아닌 거 같다. 물론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능력인 생각을 많이 한다는 가정 하에. 그냥 시간만 때우고 나이 먹는 거는 아무 소용 없어. 근데 보통 유비같은 인물은 뭔가를 이뤄가면서 변한다니까. 그리고 자신은 지금껏 머리 속의 생각이라 표출하는 생각에 이격이 있는 걸 스스로 알고 있기에 자신의 생각대로 하면 앞으로도 잘 될 거라 착각하지. 내가 볼 때 유비의 대패한 원인은 거기에 있다고 본다. 이기고 지고 그런 표면적인 것보다 상황적인 맥락에서 볼 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