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독서

글쓰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신영복 지음/돌베개

2004년 3월 26일 읽은 책이다. 신영복 교수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이 책을 알게 된 것은 공교롭게도 지금 현재 감옥에 있는 분으로부터 추천받은 책이다. 물론 감옥 들어가기 이전에 추천받은 책이긴 하지만, 추천인이 감옥에 들어간 다음부터 읽기 시작했으니 감옥 생활이라는 것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책이었던 듯 싶다.

이 책은 신영복 교수님이 감옥에서 있으면서 가족이나 친지들에게 쓴 엽서들을 모아서 엮은 책이다. 고로 대부분의 엽서들 말미에는 무엇을 잘 받았다 다음번에는 무엇을 넣어달라 그리고 가족의 안부등이 항상 나오는 게 특징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나는 글을 잘 쓰지 못한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설득력있는 글을 쓸 뿐이지 글 자체를 잘 쓰는 것은 아닌 듯 했다. 즉, 말을 잘 하면 잘 했지 글을 잘 쓰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느꼈다는 것이다. 말을 잘 하는 것과 글을 잘 쓰는 것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책이었다.

한글이 이렇게 아름답게 묘사될 수가 있는가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참 글이 아름다웠고 표현력이 참 다양했고 글 자체가 아름다웠다고 생각된다. 어떻게 이렇게 글을 쓰지 하는 의문을 지울 수가 없다.

신영복 교수님은 국문학과 출신이 아니다. 서울대 경제학과와 동대학원 출신인 경제학파인데, 어찌 이렇게 글을 잘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신영복 교수님이 쓴 다른 저서인 <나무야 나무야>란 책을 읽어본 사람들도 느낌이 같지 않을까 싶다. 아니 너무 내가 메마른 정보 위주의 책만 읽어서 그렇게 느끼는 것인가? 모를 일이다.

아름다운 말들을 여기에 담기는 힘들다. 항상 정리할 때는 나만의 법칙인 내가 조금은 다시 볼 만한 정보성의 글이나 어떤 연상을 할 수 있는 매개체를 줄 수 있는 글단락을 옮기는 것일 뿐 이 정리가 이 책을 다 보여주지는 못한다. 아니 이 책의 묘미는 여기 정리에 옮길 수가 없었다.

이 책을 추천한 지인과 편지를 주고 받는다. 지금 이 글을 적고 있는 지금도 책상 한 켠에는 7통의 편지가 쌓여 있다. 나는 인터넷을 이용해 전자 서신을 보내고, 지인은 우편으로 보낸다. 그런데 어찌 내가 보내는 것보다 받는 것이 더 많은지...

지인도 글을 잘 적는다. 그래서 그런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으면서 15척 담벼락 안에 있는 지인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려고 했다. 웃긴 것은 15척 담이라는 표현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그리고 지인의 편지 속에도 똑같이 실려 있는 표현이다.

편지를 보낼 때 한 번은 조금은 그래도 이 책을 통해서 배운 글쓰기 법으로 적어보았는데, 확실히 보통 나의 스타일로 적을 때 보다는 생각도 많이 하게 되고 시간도 많이 걸렸다. 글쓰기도 연습이 필요한 듯 싶다.

감옥에서의 생활을 다룬 내용이 아니다. 뺑기통 이라는 소설 식의 책이 아니라 가족간의 훈훈한 얘기들 그리고 감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관조적인 자세로 본 내용들 그리고 신영복 교수님의 사색의 세계(이게 가장 많다.)를 엿볼 수 있는 책이니 추천하는 바이다. 현재 신영복 교수님은 현재 성공회대학교에서 교수 생활을 하고 계신다. 내 친구가 거기서 석사 과정을 밟고 있어서 알게 된 사실이다.

-----------------

1. p101~p102
실상 획의 성패란 획 그 자체에 있지 않고 획과 획의 관계 속에 있다고 이해합니다. 하나의 획이 다른 획을 마나지 않고 어찌 제 혼자서 '자'(字)가 될 수 있겠습니까. 획도 흡사 사람과 같아서 독존하지 못하는 '반쪽'인 듯합니다.

마찬가지로 한 '자'가 잘못된 때는 그 다음 자 또는 그 다음다음 자로써 그 결함을 보상하려고 합니다. 또 한 '행'(行)의 잘못은 다른 행의 배려로써, 한 '연'(聯)의 실수는 다른 연의 구성으로써 감싸려 합니다. 그리하여 어쩌면 잘못과 실수의 누적으로 이루어진, 실패와 보상과 결함과 사과와 노력들이 점철된, 그러기에 더 애착이 가는, 한 폭의 글을 얻게 됩니다.

이렇게 얻은 한폭의 글은, 획, 자, 행, 연 들이 대소, 강약, 태세, 지속, 농담 등의 여러 가지 형태로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양보하며 실수와 결함을 감싸주며 간신히 이룩한 성취입니다. 그중 한 자, 한 획이라도 그 생김생김이 그렇지 않았더라면 와르르 얼개가 전부 무너질 뻔한, 심지어 낙관까지도 전체 속에 융화되어 균형에 한 몫 참여하고 있을 정도의, 그 피가 통할 듯 농밀한 '상호연계'와 '통일' 속에는 이윽고 묵과 여백, 흑과 백이 이루는 대립과 조화, 그 '대립과 조화' 그것의 통일이 창출해내는 드높은 '질'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에 비하여 규격화된 자, 자, 자의 단순한 양적 집합이 우리에게 주는 느낌은 줄 것도 받을 것도 없는 남남끼리의 그저 냉랭한 군서일 뿐 거기 어디 악수하고 싶은 얼굴 하나 있겠습니까.

유리창을 깨드린 잘못이 유리 한 장으로 보상될 수 있다는 생각은, 사람의 수고가, 인정이 배제된 일정액의 화폐로 대상될 수 있다는 생각만큼이나 쓸쓸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획과 획 간에, 자와 자 간에 붓을 세우듯이, 저는 묵을 갈 적마다 인(人)과 인 간(間)의 그 뜨거운 '연계' 위에 서고자 합니다.

2. p174
노자의 일절

挻埴以爲器 當基無 有器之用
연식이위기 당기무 유기지용

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 경우, 그릇으로서의 쓰임새는 그릇 가운데를 비움으로써 생긴다.
'없음'(無)으로써 '쓰임'(用)으로 삼는 지혜.

3. p212~p213
각각 다른 골목을 살아서 각각 다른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한 방에서 혼거하게 되면 대화는 흔히 심한 우김질로 나타납니다. 귀신이 있다 없다, 소방차가 사람을 치어도 죄가 안된다 된다던 국민학교 때의 숙제를 닮은 것에서부터, 서울역 대합실 천장의 부조가 무궁화다, 사꾸라꽃이다라는 기상천외한 것에 이르기까지 그 제재의 다채로움과 그 목소리의 과열함은 스산한 감방에 사람 사는 듯한 활기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나는 이를 시끄럽다 여기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경험적 사실을 곧 보편적 진리로 믿는 완강한 고집에서 나는 오히려 그 정수의 형태는 아니라 하더라도 신의와 주체성의 일면을 발견합니다. 섬 사람에게 해는 바다에서 떠서 바다로 지며, 산골 사람에게 해는 산봉우리에서 떠서 산봉우리로 지며, 서울 사람에게 있어서 해는 빌딩에서 떠서 빌딩으로 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섬 사람이 산골 사람을, 서울 사람이 섬 사람을 설득할 수 없는 확고한 '사실'이 됩니다.

지구의 자전을 아는 사람은 이 우김질을 어리석다 깔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렇다면 바다나 산이나 그런 구체적인 경험의 현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뜨는 해를 볼 수 있는가? 물론 없습니다. 있다면 그곳은 머리 속일 뿐입니다. '우주는 참여한는 우주'이며 순수한 의미의 관찰, 즉 대상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가치중립적인 관찰이 존재할 수 없는 법입니다.

경험이 비록 일면적이고 주관적이라는 한계를 갖는 것이긴 하나, 아직도 가치중립이라는 '인텔리의 안경'을 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나는, 경험을 인식의 기초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공고한 신념이 부러우며, 경험이라는 대지에 튼튼히 발 딛고 있는 그 생각의 '확실함'을 배우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추론적 지식과 직관적 예지가 사물의 진상을 드러내는 데 유용한 것이라면, 경험 고집은 주체적 실천의 가장 믿음직한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몸소 겪었다는 사실이 안겨주는 확실함과 애착은 어떠한 경우에도 쉬이 포기할 수 없는 저마다의 '진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4. p245~246
바늘 구멍으로 황소를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대상이 물건이 아니라 마음을 가진 '사람'인 경우에는 이 바라본다는 행위는 그를 알려는 태도가 못됩니다. 사람은 그림처럼 벽에 걸어놓고 바라볼 수 있는 정적 평면이 아니라 '관계'를 통하여 비로소 발휘되는 가능성의 총체이기에 그렇습니다.

한편이 되어 백지 한 장이라도 맞들어보고 반대편이 되어 헐고 뜯고 싸워보지 않고서 그 사람을 알려고 하는 것은 흡사 냄새를 만지려고 하고 바람을 동이려 드는 헛된 노력입니다.

대상을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바라보는 경우, 이 간격은 그냥 빈 공간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선입관이나 풍문 등 믿을 수 없는 것들로 채워지고, 이것들은 다시 어안렌즈가 되어 대상을 왜곡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풍문이나 외형, 매스컴 등,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인식은 '고의'보다는 나을지 모르나 '무지'보다는 못한 진실과 자아의 상실입니다.

5. p271
논어 옹야편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知者 不如樂之者
지지자 불여호지자 호지자 불여락지자

안다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그것을 즐기는 것만 못하다

'지'(知)란 진리의 존재를 파악한 상태이고,
'호'(好)가 그 진리를 아직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한 상태로 보는데 비하여
'낙'(樂)은 그것을 완전히 터득하고 자기 것으로 삼아서 생활화하고 있는 경지

6, p334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소위 가운데 필연적으로 존재하게 마련인 '작은 실패'를 간과하지 않는 자기비판의 자세입니다. 실패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실패의 발견이 필요한 것이며, 실패가 값진 것이 아니라 실패의 교훈이 값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실패와 그 실패의 발견, 그것은 산에 나무가 있고 땅 속에 바위가 있듯이 우리의 삶에 튼튼한 뼈대를 주는 것이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