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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어쩔 수 없구나 나는

#0
요즈음 일에 미쳐서 산다. 아주 즐겁게 일하고 있다. 근데 몸이 이상하다. 하루에 평균 4시간 정도 잔다. 그것도 2시간씩 두 번 나눠서. 그러다 한 번은 골아떨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예전에 골아떨어졌을 때는 12시간 이상을 자곤 했는데 요즈음은 5시간이 고작이다. 그러다 보니 가끔씩은 하루 종일 멍한 경우도 있다. 머리가 잘 안 돌아간다는 느낌. 확실히 잠을 잘 자야 머리에 윤활유를 바른 듯 잘 돌아가는데. 근데 요즈음은 잠이 부족하다. 부족하면 자면 되는데 희한하게 오래 자지도 못해. 게다가 주말도 없어.

#1
살다가 이런 때가 있다. 게다가 지금은 그래야할 때이고. 원래 나는 순간폭발력이 좋지 지구력이 좋진 않은데 지금과 같은 때는 순간폭발력에 지구력까지 더해져 화력이 쎄다. 이런 경우에는 두려울 게 없다. 그냥 전력질주. 앞만 보고 내달린다. 뒤는 안 돌아본다. 

#2
사실 나이 들어서 이럴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나이 40 넘어가니 몸도 안 받쳐주고 예전만 같지 않게 느껴져서 이게 나이를 먹는 거구나 싶었지. 그런데 왠걸. 어떤 상황에 놓이니까 나는 또 그렇게 되더라. 나 스스로도 좀 신기했다. 올인. 말은 쉽지 쉽지 않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정도의 노력? 그 정도 해서는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순 없지. 지금은 최선을 다한다는 정도가 아니라 올인의 단계. 업무량 엄청나고, 내 머리 속에는 일 생각 밖에 없다.

#3
일전에 내 평생 살면서 아버지한테 그런 얘기 들어본 적 없었는데 그 때가 떠오른다. 그 때가 새벽 2시 넘어서였는데, 부자지간 그닥 대화 없이 살아왔지만 얘기를 좀 하자고 어렵게 말을 꺼내셨지. 나는 잊지 못한다. 그 때 내게 했던 얘기를.

"니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큰 법. 그러나 부모기 때문에 항상 믿어줬지만 내 인생 최고의 슬럼프 3년을 보내는 와중에 들었던 얘기다. 어릴 때부터 뭔가 남다른 구석이 많았기에 뭔가를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잠깐 그런 듯 보이기도 했지만 나이 들어 최근에는 극심한 슬럼프였다. 나 스스로도 정말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절이었던 걸로 기억되니까.

"그냥 취직해서 편하게 살아라."
"그건 방법이 아닙니다. 나를 포기할 순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할래?"
"분명 기회가 올 겁니다."
"뜬구름 잡는 소리 하지 마라."
"그렇다고 그렇게 하는 건 최악의 선택입니다. 그 선택으로 내 인생을 담보 잡힐 순 없어요."
"대안이 있어야할 거 아니냐."
"때론 대안이 없이 흘러갈 때도 있는 법입니다."
"이렇게 해서 어떻게 할래?!"
"저라고 이러고 싶겠습니까. 때가 아니니까 그런 거죠."
"모르겠다. 니 맘대로 해라."
"분명 살다보면 기회는 오기 마련입니다. 딱 한 번의 기회면 되요."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라."

대충 이런 대화였다. 아버지만이 아니라 어머니도 그랬고. 내 인생에서 처음 맛보는 자존감 상실. 나는 안 되는 녀석인가? 자신감 빼면 시체였고, 나서면 기대 이상을 보여줬던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나. 그리고 많은 생각. 고뇌. 그런 과정 속에서 얻은 것 또한 실로 크다. 그래서 올해 초에 은사님 뵙고서 그랬던 거다. 완성형 이승건을 보여드리겠노라고. 자신있다고. 고생 정말 많이 했지만 이젠 자신있다고. 준비됐다고. 그 핵심은 나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다. 내가 왜 이 모양 이 꼴이었는지를 아주 냉정하게 돌아봤던. 

#4
나는 동양철학을 조금 맛봤기 때문에 내 사주를 어느 정도 안다. 작년부터 그 흐름이 바뀌었고, 그 이후로는 다시는 흐름이 꺾이지는 않는다. 이런 걸 보는 방법이 있는데 그냥 곧이 곧대로 얘기해주는 걸 믿는 게 아니거든. 여튼 작년 초만 해도 나는 사실 그랬다. 이제 슬슬 때가 오는데 뭔가 왜 안 일어나지. ㅎㅎ 지금과는 너무도 달랐던.

#5
그냥 신기하다. 지금 돌이켜보면 일이 풀리려고 그러는지 우연의 연속이라도 운이 좋았다. 모든 일이 나 혼자 잘 한다고 되는 건 아니니 말이다.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렇다. 꼭 기회라고 해서 이러는 건 아니다. 그냥 그렇게 되더라. 신기하게도. 다만 항상 머리 속에 염두에 두고 있는 건, 지난 3년의 슬럼프 때 내가 얻었던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