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우선 재미가 있어야 한다. 재미가 없으면 누가 그 영화를 장시간 앉아서 보려 하겠는가? 이 재미라는 것이 저마다의 기준이 제각각이겠지만 보편적인 재미라는 것이다. 어떤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가 느끼는 재미가 아닌 인간이라면 보편적으로 고개를 끄덕거릴 수 있는 재미 말이다. 그러한 재미적인 요소는 영화의 필수라 할 것이고 그러한 재미가 보편적이 되었을 때는 대중성을 가졌다고 할 것이다. 허나, 대중성을 가졌다는 것이 상업성을 가졌다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대중성을 가졌지만 어거지의 웃음, 어처구니 없는 웃음이나 억지적인 요소들과 현란한 기법으로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상업성의 영화는 엄격히 이와는 다르다.
상업성이라는 관점에서 영화는 현실의 부산물이다. 상업성이라는 것을 도외시할 수 없다는 얘기다. 그래서 상업성이 있든 없든 난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제작자나 감독의 의도가 상업성을 그리고 많은 관객들에게 웃음을 또는 영화를 보는 순간동안만은 딴 세계에 몰입을 시키는 재미를 주려고 했다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의 의미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배우 중심의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얘기로 어거지 웃음을 자아내려고 하는 우리 한국 일부 영화들은 제작자 부터 시작해서 감독, 주연급 배우들까지 없어져야 한다.(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최근에 나온 영화 하나를 예로 들자면 '오! 해피데이' - 물론 난 보지도 않았다. 왜냐면 안 봐도 뻔하니까)
아무리 헐리우드의 영화를 상업성이 짙은 영화라 어찌한다 해도 거기에는 볼 만한 요소들이 많다. 현란한 특수 기법과 함께 사람들의 눈을 놀라고 하고 신기함을 주며 그 속에 재미를 심어두었고 요즈음과 같이 탄탄한 스토리가 가미가 되었기 때문에 난 헐리우드 영화를 나쁘게 보지만은 않는다. 상업성이 짙다는 것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상업성을 목적으로 만들었거나, 대중성을 목적으로 만들었는데 어필이 되어 상업적으로도 성공했거나. 그렇기 때문에 상업성이 짙다라는 것은 그러한 것을 판별을 해서는 안 된다. 영화 내용 그것만을 가지고 판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재미적인 요소보다 더 우선시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감동이다. 감동이라 함은 우리가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느끼는 감흥일 것이다. 멜로물을 보고 아름다운 사랑을 꿈꾸고 현실 속에서 그런 아름다운 사랑을 찾기도 하고, 가족의 따뜻함을 보고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전화를 하기도 하고. 이러한 감동은 사람을 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변한다 해도 나쁘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좋게 변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게 오래 가지 못한다. 그것은 사람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지 오래 가지 못하니 그게 무슨 소용있냐 하는 얘기는 참 우매한 발상이요 졸렬한 발상이다.
감동. 한 편의 영화가 주는 감동. 영화를 보면서 흘리는 눈물. 느끼는 감정. 이것은 단순한 재미를 뛰어 넘는다. 재미는 한 순간이고 극장을 나오면서 친구들끼리의 얘기 요소는 되겠지만 감동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 적어도 행동의 변화를 야기 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난 그것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영화가 있다. 솔직히 난 당시에 영화보다는 다른 것에 관심이 많아서 이 영화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었다. 오랜 노하우로 비디오 샵에 배치된 신프로 출시작 리스트들의 주연, 감독 그리고 제목들을 보고 내가 볼 비디오를 선택하게 되는데 그다지 기대는 하지 않았던 영화였었다. 그러나 아마도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보고 느끼는 것은 공통되었을 것이다. 재미있고 우습지만 감동적이다. 내가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을 대단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이거다. 뭔가의 감동을 전달해 주기 위해서 그는 해학이라는 기법을 통했다는 것이다. 마치 웃으면서도 너무나 슬퍼서 눈물을 흘리는 그런 영화. 그것이 영화의 진정한 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까지 재미라는 것을 얘기했고, 감동이라는 것을 얘기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한 것이 있는데 나는 그것을 전율, 카타르시스라 부른다. 용어가 어찌했던 간에 비평가들이나 좀 아는 사람들이 그것을 전율이라고 하는가 라고 얘기하지 말기를 바란다. 나는 모른다. 내가 느끼는 그것을 나는 단지 전율, 카타르시스라고 일컬을 뿐이다. 수많은 영화들 중에서 감동을 느끼는 영화는 그래도 꽤 있다. 그만큼 많이 나오는 영화들 중에서 감동적인 영화가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끔 하는 온 몸에 전율을 느끼게 하는 그런 영화는 정말 만나기 힘이 들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최근에 본 '소년은 울지 않는다.' 그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그 감정 형언하기 힘든 그 감정 그것이 영화의 최고조에 달하는 極이 아닐까 한다.
인생을 살면서 보기 드문 현인(賢人)을 만나 가슴 뿌듯한 추억을 갖고 있듯이 이런 영화는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죽을 때 까지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겨주곤 한다. 사람은 훗날 추억에 먹고 산다고 한다. 그런 추억 속에서 당신의 추억 속에서 영화 한 편이 있다고 한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 아닐까 한다. 초등학교 때 중학교 때 친했던 친구가 기억이 나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한 장면 잊을 수 없는 장면 또는 한 편의 영화에서 느꼈던 그 카타르시스 그것이 떠오른다면? 그만큼 영화는 위대하다. 그리고 내가 많은 영화를 보는 이유도 때로는 재미 적인 요소를 찾을 때도 있긴 하지만 이런 영화를 만나기 위해서이다.
상업성이라는 관점에서 영화는 현실의 부산물이다. 상업성이라는 것을 도외시할 수 없다는 얘기다. 그래서 상업성이 있든 없든 난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제작자나 감독의 의도가 상업성을 그리고 많은 관객들에게 웃음을 또는 영화를 보는 순간동안만은 딴 세계에 몰입을 시키는 재미를 주려고 했다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의 의미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배우 중심의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얘기로 어거지 웃음을 자아내려고 하는 우리 한국 일부 영화들은 제작자 부터 시작해서 감독, 주연급 배우들까지 없어져야 한다.(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최근에 나온 영화 하나를 예로 들자면 '오! 해피데이' - 물론 난 보지도 않았다. 왜냐면 안 봐도 뻔하니까)
아무리 헐리우드의 영화를 상업성이 짙은 영화라 어찌한다 해도 거기에는 볼 만한 요소들이 많다. 현란한 특수 기법과 함께 사람들의 눈을 놀라고 하고 신기함을 주며 그 속에 재미를 심어두었고 요즈음과 같이 탄탄한 스토리가 가미가 되었기 때문에 난 헐리우드 영화를 나쁘게 보지만은 않는다. 상업성이 짙다는 것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상업성을 목적으로 만들었거나, 대중성을 목적으로 만들었는데 어필이 되어 상업적으로도 성공했거나. 그렇기 때문에 상업성이 짙다라는 것은 그러한 것을 판별을 해서는 안 된다. 영화 내용 그것만을 가지고 판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재미적인 요소보다 더 우선시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감동이다. 감동이라 함은 우리가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느끼는 감흥일 것이다. 멜로물을 보고 아름다운 사랑을 꿈꾸고 현실 속에서 그런 아름다운 사랑을 찾기도 하고, 가족의 따뜻함을 보고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전화를 하기도 하고. 이러한 감동은 사람을 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변한다 해도 나쁘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좋게 변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게 오래 가지 못한다. 그것은 사람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지 오래 가지 못하니 그게 무슨 소용있냐 하는 얘기는 참 우매한 발상이요 졸렬한 발상이다.
감동. 한 편의 영화가 주는 감동. 영화를 보면서 흘리는 눈물. 느끼는 감정. 이것은 단순한 재미를 뛰어 넘는다. 재미는 한 순간이고 극장을 나오면서 친구들끼리의 얘기 요소는 되겠지만 감동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 적어도 행동의 변화를 야기 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난 그것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영화가 있다. 솔직히 난 당시에 영화보다는 다른 것에 관심이 많아서 이 영화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었다. 오랜 노하우로 비디오 샵에 배치된 신프로 출시작 리스트들의 주연, 감독 그리고 제목들을 보고 내가 볼 비디오를 선택하게 되는데 그다지 기대는 하지 않았던 영화였었다. 그러나 아마도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보고 느끼는 것은 공통되었을 것이다. 재미있고 우습지만 감동적이다. 내가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을 대단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이거다. 뭔가의 감동을 전달해 주기 위해서 그는 해학이라는 기법을 통했다는 것이다. 마치 웃으면서도 너무나 슬퍼서 눈물을 흘리는 그런 영화. 그것이 영화의 진정한 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까지 재미라는 것을 얘기했고, 감동이라는 것을 얘기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한 것이 있는데 나는 그것을 전율, 카타르시스라 부른다. 용어가 어찌했던 간에 비평가들이나 좀 아는 사람들이 그것을 전율이라고 하는가 라고 얘기하지 말기를 바란다. 나는 모른다. 내가 느끼는 그것을 나는 단지 전율, 카타르시스라고 일컬을 뿐이다. 수많은 영화들 중에서 감동을 느끼는 영화는 그래도 꽤 있다. 그만큼 많이 나오는 영화들 중에서 감동적인 영화가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끔 하는 온 몸에 전율을 느끼게 하는 그런 영화는 정말 만나기 힘이 들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최근에 본 '소년은 울지 않는다.' 그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그 감정 형언하기 힘든 그 감정 그것이 영화의 최고조에 달하는 極이 아닐까 한다.
인생을 살면서 보기 드문 현인(賢人)을 만나 가슴 뿌듯한 추억을 갖고 있듯이 이런 영화는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죽을 때 까지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겨주곤 한다. 사람은 훗날 추억에 먹고 산다고 한다. 그런 추억 속에서 당신의 추억 속에서 영화 한 편이 있다고 한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 아닐까 한다. 초등학교 때 중학교 때 친했던 친구가 기억이 나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한 장면 잊을 수 없는 장면 또는 한 편의 영화에서 느꼈던 그 카타르시스 그것이 떠오른다면? 그만큼 영화는 위대하다. 그리고 내가 많은 영화를 보는 이유도 때로는 재미 적인 요소를 찾을 때도 있긴 하지만 이런 영화를 만나기 위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