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기존에 내가 집단지성에 대한 완연한 이해를 아직은 하지 못했을 시절에 적었던 글 때문에라도 필요성을 느껴 적는 글이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인터넷 상의 이슈를 집단지성이라고 할 수 있는가?
피에르 레비 교수는 직접적으로 이런 인터넷 상(그가 말하는 사이버 공간상)의 이슈를 두고 얘기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할 부분이 보이는 것이 실시간 민주주의라는 부분에서 나온다. 이러한 실시간 민주주의를 설명하는데에서 이런 표현을 쓰고 있다.
직접 민주주의의 선동 및 즉각적인 군중 효과와 전적으로 상반된다는 점을 진작부터 강조해두자. 사실 집단 지성의 두 가지 시간, 즉 집단 지성이 형성되는 시간과 한 번 형성된 뒤 그것이 작용하는 시간을 구분해야 한다.사실 군중 효과에 대해서 얘기하려면 심리학자에게 물어봐야할 듯. 심리학에 관심이 많은 나이긴 하지만 심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는 지라 비슷한 효과들이 많이 있는 것으로 안다. 그것이 어떻게 구분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논외로 하고 이 글을 읽을 정도의 지적 수준이라면 군중 효과라는 것이 어렴풋이 무엇이라는 것을 이해할 것이라 생각한다.
위에서 중요한 두 가지 키워드는 "선동"과 "즉각적인"이라는 것이다. 내가 이해하는 군중 효과라는 것도 어떤 선동자라는 매개체가 있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니 선동이라는 말이 중요할 듯 하다. 피에르 레비 교수는 이 부분에서 선동이라는 것보다는 "즉각적인"이라는 말에 더 초점을 두고 있는데, 집단지성이 형성되는 시간은 반드시 느릴 수 밖에 없다고 얘기한다.
사실 따지고 들자면 그럼 얼마의 기준이 되어야 느리다고 할 수 있을까? 1일? 1주일? 1달? 허나 지금까지 집단지성의 이해 시리즈 글을 보면 알겠지만 피에르 레비의 집단지성은 그런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피에르 레비 교수가 말한 "즉각적인"이라는 말은 매우 잘 해석을 해야만 한다. 이 "즉각적인"이라는 것을 해석하기 위해서 나는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1. 형성되는 시간이 짧다.
사실 "즉각적인"이라고 하는 것의 포인트는 여기에 있다. 피에르 레비 교수는 집단지성이 형성되는 시간은 반드시 느릴 수 밖에 없다고 하는 부분에 정면 대치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왜 느릴 수 밖에 없고 시간이 짧다고 집단지성이라고 할 수 없는가?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 부분이 많다.
그러나 내가 적은 기존의 집단지성 이해 시리즈를 읽다보면 피에르 레비 교수의 집단지성에 대해서는 인류학적 관점에서 접근을 해야할 필요성이 있다. 인류학적인 관점이라서 시간이 오래 걸려야 하는가? 그건 또 아니다. 좀 관점을 크게 보고 해석을 해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가 "즉각적인"이라고 부를 만한 시간인가라고 접근하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집단지성이라고 충분히 불릴만한 요소들을 갖출 수 있는가 하는 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그런 접근을 하면 사실 시간은 의미가 없다. 다만 그런 요소들을 갖추기 위해서 시간이 좀 걸린다는 것을 피에르 레비 교수는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 생각한다.
집단지성은 그것 자체를 위해서 지속적으로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 만한 것이어야 한다. 어떤 단편적인 사회 현상을 두고 다수의 사람들이 얘기를 하는 것이 이슈라고 한다면 그 이슈들은 하루에 하나씩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으로 지속성이 없다. 단발적이고 즉흥적인 것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의미가 있다. 그것은 아래의 두번째 초점인 "작용하는 시간"이라는 관점과 같이 생각을 해야할 부분인데, 쉽게 얘기하면 이런 이슈에 대한 떠듬(?)이 쌓이고 쌓여서 어떤 작용을 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하나의 이슈 그 자체만 두고 집단지성을 논했던 위의 글은 여전히 나 스스로도 집단지성에 대한 이해를 완연히 하지 못한 시절의 글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 글을 적었을 때는 이슈라고 하는 것이 지성의 산물이 아닌 감성의 산물들(악플에 대한 마녀 사냥식의 이슈들)을 포함하는 것이고 지금 이해를 하고 얘기를 한다 하여도 그런 감성의 산물들은 여기 집단지성과는 거리가 매우 멀다는 점은 명확히 해야할 필요가 있겠다.
2. 작용하는 시간이 없다.
우리가 아는 사람이라고 명명할 때 그냥 동네에서 길 지나가다가 몇 번 마주쳤다고 아는 사람이라고 하지는 않는 것이다. 어떤 서로 간의 관계가 생겨야만 아는 사람(지인)이라고 명명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인터넷 상의 이슈들은 단발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사람과 같다.
형성되는 시간의 관점에서 어떠한 이슈가 다시 재발하고 그것은 다시 논의하는 과정이 산발적으로 이루어진다 하여도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형성되는 시간이 늘어났을 뿐인 것이다. 그것은 스쳐 지나가는 사람을 몇 번 본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을 우리가 지인이라고 명명하지는 않지 않은가?
지인이 되려면 어떤 상호간의 작용이 있어야만 한다. 간단한 목례를 하다 서로 인사를 나누게 되고 서로 얘기를 하는 과정을 거쳐가면서 지인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작용하지 않는 것은 집단지성의 범주에 포함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사회적 현상에 대한 이슈가 쌓이고 쌓여서 그것이 바람직한 결과로 사회가 바뀌는 것 그것이 집단지성의 작용이라 하겠다.
이것은 <위키노믹스>의 Sony 사태에서도 보이는 부분이며, 다른 여러 책에서 많이 나오는 사례들 중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결국 이렇게 작용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는 자연스레 형성되는 시간이 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면 세상에 어떠한 것이든지 100% 옳다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없다. 다만 이보다 저것이 더 낫다는 것만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논의 과정 중에서 많은 다른 시야를 가진 다양성을 수용하려면 길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하나의 이슈에 대해서 부분을 두고 집단지성이냐 아니냐를 얘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피에르 레비 교수가 말하는 집단지성과는 거리가 멀다고 얘기할 수 있겠다.
+ 집단지성과 협업지성 그리고 군중심리 등에 대한 더 읽을거리 → 집단지성? 협업지성? 군중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