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든 독서클럽의 인문/사회팀 1월 독서토론 책이 바로 <군주론>이다. 십수년 전에 읽었던 군주론을 다시 사서 읽어야 될 판국이다. 이 글은 독서클럽에 올라온 내용들에서 제가 하고 싶은 얘기를 적는 글이며, 그 외에 추가적으로 몇가지 적기 위해서 적는 글이다. 군주론에 대한 해석이나 내 견해는 여기에 적지 않았다.
이해는 해석의 산물이다
이해라는 것은 해석의 산물이다. 해석을 하지 않고서 이해라는 것에 도달하기는 힘든 법이다. 그러나 해석은 매우 주관적일 수 있기 때문에 이해라는 결과는 각자 다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우리가 생각해야할 것은 해석이라는 것은 감성에 기반한 것이 아닌 이성과 지성에 기반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성과 지성을 기반으로 한 것은 기존에 알고 있는 것이 많을수록 유리하다. 왜냐면 그만큼 여러 부분에서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때로는 이러한 것이 행동의 제약으로 귀결이 되기도 하지만 순수하게 지식을 얻는다는 측면에서만 본다면 분명 유리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유리하다고 해서 올바른 해석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지식의 우물에 빠져 해석을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사실에 기반하여 하는 얘기는 뭐라할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그것은 자신의 해석을 설득력 있게 얘기하는 데에 매우 좋은 재료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지식이 있으면 유리한 법이다.
군주론을 이해하려면
군주론을 리더십 관점에서 이해하던지 어떤 관점에서 이해하던지 간에 필요한 것은 시대적 상황이다. 그것은 작가의 의도가 어떤지 그 당시에 쓰인 이 책이 왜 의미가 있었던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즉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서 필요한 재료라는 얘기다.
그렇다고 해서 고전을 읽는데 얼마나 그 시대 상황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는가? 하는 부분은 논외다. 그것은 계량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런 시대 상황을 어느 정도 자신이 이해할 수 있을 정도(사람마다 다르지만)는 필요한 법이다.
만약 시대 상황을 자신이 이해했다 하더라도 자신이 모르는 부분이 언급이 되면 그것을 수용할 줄도 알아야 한다. 왜? 몰랐으니까. 그것을 계기로 또 찾아보고 알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고전을 볼 때 그 시대에 대해 얼마나 알아야 그 고전에 대해서 얘기를 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발생하고 이 문제는 답이 없는 문제기 때문에 의미 없는 논쟁이 되는 것이다.
군주론의 원서 The Prince
이것은 굳이 얘기 안 하려고 했지만 독서클럽에 덧글 중에 Prince를 왕자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어서 언급하는 것이다. Prince라는 것을 일반적으로 King이 되기 이전의 상태인 왕자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Prince라는 것은 군주라고 이해해야 된다고 본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적었을 때에는 1513년이다. 이 때는 책이라고 해도 자신이 직접 적은 글의 묶음의 형태였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책처럼 출판되는 것은 마키아벨리 사후인 1532년이다.) 그 때 썼던 용어가 Prince가 무엇을 말하는 지를 이해해야 한다. Prince 라는 용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음을 발견할 수 있다.
위에서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책으로 적었을 때 출판이 된 것은 아니었다고 얘기했다. 자신의 생각을 담은 글을 적는 데에 당시에는 글로서의 형식이라는 것에 얽매이지 않았다고 본다. 결국 문어체로 사용되던 용어가 사용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리고 Prince라는 것이 왕자로 해석되어서는 애매하다. 오히려 메디치 가문에 헌정하는 것이라면 King이라는 용어가 더 어울린다. 그러나 King이 아닌 Prince라는 것은 당시에는 왕을 King이라기 보다는 Prince라고 불렀을 수도 있을 것이다.(문어로 Prince를 왕이라고도 해석이 되기 때문. 그런데 나는 언어학자가 아니다. 그냥 유추만 할 뿐)
이렇듯 배경을 알아야만 정확한 해석이 되는 경우가 있다. 더군다나 고전이기도 하면서 정치관련 서적인 <군주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배경에 대한 이해는 필수인 법이다. 그러나 나는 왕이라는 의미로 Prince를 해석하지 않았다.
군주라고 해석을 했는데 그것은 피렌체 공화정이 무너지고 등장한 강력한 군주라는 의미에서 Prince를 사용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공화제의 반대가 군주제니까 군주라는 것에 포인트를 뒀다는 것이다. 군주라고 하는 용어가 Monarch라는 말이 있지만 그것은 현재 우리가 쓰는 말이지 당시에는 그 말을 썼는지는 모르는 거 아니겠는가? 만약 그것을 군주라고 해석하지 않았다면 이 책의 제목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면서 <군주론>이라고 명명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전의 의미
구텐베르크가 1438년 인쇄술을 발명하여(물론 동양이 앞섰지만) 1450년에 인쇄공장을 만들고 1460년에 <구텐베르크 성서>를 출판했다. 인쇄공장을 만들고 얼마나 이런 저런 출판물을 많이 찍었을까? 그러나 역사에서 기록된 것을 찾아보면 1460년에 <구텐베르크 성서>라고 나온다. 이와 같이 시대를 거듭하면서 기록되는 것들은 중요한 것만 기록이 되고 중요한 것만 남게 되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전이 여태까지 남아 있는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후에 인쇄술이 얼마나 대중화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대중화되기 이전에는 그럼 어떻게 지식을 전달했을까? 말로서 구전이 되고 그것을 기록하여 글로써 남겼을 것이다. 그 글이 좋아서 다른 사람들이 베껴가면서 아주 미약하게 나마 퍼지게 되었던 것이다. <음란서생>이라는 영화에서도 보면 그렇게 원문을 베끼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가?
인쇄술이 대중화되기 이전에는 아는 사람들 사이에 읽히고 베껴져서 지금까지 내려온 책이다. 당대에는 지금과 달리 글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남기 쉬웠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수백년동안 시대를 거듭하면서 읽히기는 쉽지 않다. 왜냐면 시대가 다르면 그만큼 상황도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고전이라고 불리는 책들 모두가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군주론>은 그 이후에 많은 정치저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책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책의 저자가 <군주론>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을 수도 있는 법이다.
현재에 투영된 시각에서 이 책에서 얘기하는 부분을 비판하거나 수용하는 것은 얼마든지 해도 되지만 고전의 의미까지 얘기하는 것은 사실 오버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마키아벨리의 생애나 당시의 이탈리아의 상황 그리고 마키아벨리의 다른 저서를 안다면 결코 그런 얘기를 쉽게 꺼내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이 책이 출판된 것은 1532년
사후에 출판된 <군주론>. 왜 출판이 되었을까? 돈이 되니까 출판을 했을까? 아마도 이 책은 읽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출판한 성격이 강하다고 본다. 당시에 출판해서 뭐 돈을 얼마나 벌 수 있었을까? 당시의 시대에 이 책에서 얘기하는 것이 들을 만하니 출판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그런 출판물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그래서 현재의 책들과 비교해서 구성이 깔끔하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그만큼 원문을 그대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각주가 많은 것과 덕지 덕지 붙어 추가된 얘기들이 많은 것은 원문은 그대로 두고 이해를 위해 필요한 내용을 넣다보니 그런 것이다. 그것을 구성이 조금 깔끔하지 못하는 것에 포함시켜서는 안 될 일이다.
그렇게 따지면 현재에는 그런 책이 없는가? 각주도 많고 참조문헌도 많은 책들 부지기수다. <군주론>을 비판하는 입장에서 이런 것까지 얘기하는 것은 그리 옳은 방법이 아니다. <군주론>의 내용이 너무 도덕적 관점을 배제한 면이 강해서 싫다는 내용적인 면에서의 비판이면 몰라도 말이다.
그리고 리더십 관점에서 <군주론>을 볼 때는 한 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점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봐야한다. 그렇게 따지면 최근 나오는 리더십들도 죄다 마찬가지다. 민주적인 리더, 포용적인 리더 등등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그게 정말 리더십의 본질일까? 결코 그렇지는 않다. 그것은 바람직한, 이상적인 리더십의 얘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군주론>의 의미
나 또한 도덕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인데 리더십의 본질을 언급하면서 이상이라고 얘기를 하니 의아해할 수도 있겠다. 그것은 나중에 <군주론> 책의 내용을 두고 얘기할 때 얘기할 생각이다. 어쨌든 <군주론>의 의미를 두고 의미가 있다 없다를 얘기하는 것은 그리 큰 의미가 없다고 본다. 오히려 그 책내용을 통해서 이런 저런 견해를 얘기하는 것 그 자체가 <군주론>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만 의미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리더십이 좋은 얘기만 하고 있지만 <군주론>은 아주 냉정하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해서 얘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웃긴 것이 지금의 정치에도 그게 먹힌다는 것 아니겠는가? 수백년 전에 쓰여졌는데도 불구하고 지금도 읽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사람 사는 세상은 환경적인 변화는 있을 지언정 인간 본성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 없다.
결국 <군주론>의 의미는 그런 데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이 말이 자칫 <군주론>에서 언급된 것을 따르면 이길 수 있다는 것으로 잘못 받아들인다던지 해석을 잘못하면 안 되는 법이다. 결국 <군주론>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어떠냐에 따라서 <군주론>의 내용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활용하는 것에 있어서는 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주 깊게 들여다 보면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또한 나중에 <군주론>을 이번에 다시 읽고 적게되는 리뷰에서 쓸 생각이다.
내가 읽을 <군주론>
내가 읽을 <군주론>을 며칠 전에 주문해서 받았다. 내가 십수년 전에 읽고 들고 있었던 책이었던 까치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군주론>이다. 이번에는 주변에 물어보고 산 것인데 번역이 깔끔하다고 한다.
사실 내가 까치에서 나온 <군주론>을 십수년 전에 읽었던 것은 까치라는 출판사에 대한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책을 읽을 때는 내가 기억하는 출판사가 까치, 동녘과 같은 책들인지라... 번역자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많이 모르기 때문에 이럴 경우에는 보통 출판사 보고 사는 게 그나마 좋은 번역본을 고를 수 있다.
아직 읽기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십수년 전에 읽을 때랑은 많이 다를 듯 싶다. 그만큼 십수년이 흐르는 동안 생각도 많이 변했고 지식도 많이 쌓았기 때문일 터. 인문/사회팀 토론보다 문학팀 토론이 먼저 있어 다른 책을 먼저 봐야하지만 이번 1월달에는 토론에 참가하기 이전에 토론할 책은 다 읽어볼 생각이다.
이해는 해석의 산물이다
이해라는 것은 해석의 산물이다. 해석을 하지 않고서 이해라는 것에 도달하기는 힘든 법이다. 그러나 해석은 매우 주관적일 수 있기 때문에 이해라는 결과는 각자 다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우리가 생각해야할 것은 해석이라는 것은 감성에 기반한 것이 아닌 이성과 지성에 기반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성과 지성을 기반으로 한 것은 기존에 알고 있는 것이 많을수록 유리하다. 왜냐면 그만큼 여러 부분에서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때로는 이러한 것이 행동의 제약으로 귀결이 되기도 하지만 순수하게 지식을 얻는다는 측면에서만 본다면 분명 유리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유리하다고 해서 올바른 해석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지식의 우물에 빠져 해석을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사실에 기반하여 하는 얘기는 뭐라할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그것은 자신의 해석을 설득력 있게 얘기하는 데에 매우 좋은 재료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지식이 있으면 유리한 법이다.
군주론을 이해하려면
군주론을 리더십 관점에서 이해하던지 어떤 관점에서 이해하던지 간에 필요한 것은 시대적 상황이다. 그것은 작가의 의도가 어떤지 그 당시에 쓰인 이 책이 왜 의미가 있었던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즉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서 필요한 재료라는 얘기다.
그렇다고 해서 고전을 읽는데 얼마나 그 시대 상황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는가? 하는 부분은 논외다. 그것은 계량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런 시대 상황을 어느 정도 자신이 이해할 수 있을 정도(사람마다 다르지만)는 필요한 법이다.
만약 시대 상황을 자신이 이해했다 하더라도 자신이 모르는 부분이 언급이 되면 그것을 수용할 줄도 알아야 한다. 왜? 몰랐으니까. 그것을 계기로 또 찾아보고 알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고전을 볼 때 그 시대에 대해 얼마나 알아야 그 고전에 대해서 얘기를 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발생하고 이 문제는 답이 없는 문제기 때문에 의미 없는 논쟁이 되는 것이다.
군주론의 원서 The Prince
이것은 굳이 얘기 안 하려고 했지만 독서클럽에 덧글 중에 Prince를 왕자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어서 언급하는 것이다. Prince라는 것을 일반적으로 King이 되기 이전의 상태인 왕자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Prince라는 것은 군주라고 이해해야 된다고 본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적었을 때에는 1513년이다. 이 때는 책이라고 해도 자신이 직접 적은 글의 묶음의 형태였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책처럼 출판되는 것은 마키아벨리 사후인 1532년이다.) 그 때 썼던 용어가 Prince가 무엇을 말하는 지를 이해해야 한다. Prince 라는 용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음을 발견할 수 있다.
<문어> 군주, 왕
위에서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책으로 적었을 때 출판이 된 것은 아니었다고 얘기했다. 자신의 생각을 담은 글을 적는 데에 당시에는 글로서의 형식이라는 것에 얽매이지 않았다고 본다. 결국 문어체로 사용되던 용어가 사용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리고 Prince라는 것이 왕자로 해석되어서는 애매하다. 오히려 메디치 가문에 헌정하는 것이라면 King이라는 용어가 더 어울린다. 그러나 King이 아닌 Prince라는 것은 당시에는 왕을 King이라기 보다는 Prince라고 불렀을 수도 있을 것이다.(문어로 Prince를 왕이라고도 해석이 되기 때문. 그런데 나는 언어학자가 아니다. 그냥 유추만 할 뿐)
이렇듯 배경을 알아야만 정확한 해석이 되는 경우가 있다. 더군다나 고전이기도 하면서 정치관련 서적인 <군주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배경에 대한 이해는 필수인 법이다. 그러나 나는 왕이라는 의미로 Prince를 해석하지 않았다.
군주라고 해석을 했는데 그것은 피렌체 공화정이 무너지고 등장한 강력한 군주라는 의미에서 Prince를 사용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공화제의 반대가 군주제니까 군주라는 것에 포인트를 뒀다는 것이다. 군주라고 하는 용어가 Monarch라는 말이 있지만 그것은 현재 우리가 쓰는 말이지 당시에는 그 말을 썼는지는 모르는 거 아니겠는가? 만약 그것을 군주라고 해석하지 않았다면 이 책의 제목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면서 <군주론>이라고 명명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전의 의미
구텐베르크가 1438년 인쇄술을 발명하여(물론 동양이 앞섰지만) 1450년에 인쇄공장을 만들고 1460년에 <구텐베르크 성서>를 출판했다. 인쇄공장을 만들고 얼마나 이런 저런 출판물을 많이 찍었을까? 그러나 역사에서 기록된 것을 찾아보면 1460년에 <구텐베르크 성서>라고 나온다. 이와 같이 시대를 거듭하면서 기록되는 것들은 중요한 것만 기록이 되고 중요한 것만 남게 되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전이 여태까지 남아 있는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후에 인쇄술이 얼마나 대중화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대중화되기 이전에는 그럼 어떻게 지식을 전달했을까? 말로서 구전이 되고 그것을 기록하여 글로써 남겼을 것이다. 그 글이 좋아서 다른 사람들이 베껴가면서 아주 미약하게 나마 퍼지게 되었던 것이다. <음란서생>이라는 영화에서도 보면 그렇게 원문을 베끼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가?
인쇄술이 대중화되기 이전에는 아는 사람들 사이에 읽히고 베껴져서 지금까지 내려온 책이다. 당대에는 지금과 달리 글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남기 쉬웠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수백년동안 시대를 거듭하면서 읽히기는 쉽지 않다. 왜냐면 시대가 다르면 그만큼 상황도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고전이라고 불리는 책들 모두가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군주론>은 그 이후에 많은 정치저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책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책의 저자가 <군주론>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을 수도 있는 법이다.
현재에 투영된 시각에서 이 책에서 얘기하는 부분을 비판하거나 수용하는 것은 얼마든지 해도 되지만 고전의 의미까지 얘기하는 것은 사실 오버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마키아벨리의 생애나 당시의 이탈리아의 상황 그리고 마키아벨리의 다른 저서를 안다면 결코 그런 얘기를 쉽게 꺼내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이 책이 출판된 것은 1532년
사후에 출판된 <군주론>. 왜 출판이 되었을까? 돈이 되니까 출판을 했을까? 아마도 이 책은 읽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출판한 성격이 강하다고 본다. 당시에 출판해서 뭐 돈을 얼마나 벌 수 있었을까? 당시의 시대에 이 책에서 얘기하는 것이 들을 만하니 출판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그런 출판물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그래서 현재의 책들과 비교해서 구성이 깔끔하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그만큼 원문을 그대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각주가 많은 것과 덕지 덕지 붙어 추가된 얘기들이 많은 것은 원문은 그대로 두고 이해를 위해 필요한 내용을 넣다보니 그런 것이다. 그것을 구성이 조금 깔끔하지 못하는 것에 포함시켜서는 안 될 일이다.
그렇게 따지면 현재에는 그런 책이 없는가? 각주도 많고 참조문헌도 많은 책들 부지기수다. <군주론>을 비판하는 입장에서 이런 것까지 얘기하는 것은 그리 옳은 방법이 아니다. <군주론>의 내용이 너무 도덕적 관점을 배제한 면이 강해서 싫다는 내용적인 면에서의 비판이면 몰라도 말이다.
그리고 리더십 관점에서 <군주론>을 볼 때는 한 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점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봐야한다. 그렇게 따지면 최근 나오는 리더십들도 죄다 마찬가지다. 민주적인 리더, 포용적인 리더 등등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그게 정말 리더십의 본질일까? 결코 그렇지는 않다. 그것은 바람직한, 이상적인 리더십의 얘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군주론>의 의미
나 또한 도덕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인데 리더십의 본질을 언급하면서 이상이라고 얘기를 하니 의아해할 수도 있겠다. 그것은 나중에 <군주론> 책의 내용을 두고 얘기할 때 얘기할 생각이다. 어쨌든 <군주론>의 의미를 두고 의미가 있다 없다를 얘기하는 것은 그리 큰 의미가 없다고 본다. 오히려 그 책내용을 통해서 이런 저런 견해를 얘기하는 것 그 자체가 <군주론>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만 의미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리더십이 좋은 얘기만 하고 있지만 <군주론>은 아주 냉정하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해서 얘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웃긴 것이 지금의 정치에도 그게 먹힌다는 것 아니겠는가? 수백년 전에 쓰여졌는데도 불구하고 지금도 읽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사람 사는 세상은 환경적인 변화는 있을 지언정 인간 본성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 없다.
결국 <군주론>의 의미는 그런 데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이 말이 자칫 <군주론>에서 언급된 것을 따르면 이길 수 있다는 것으로 잘못 받아들인다던지 해석을 잘못하면 안 되는 법이다. 결국 <군주론>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어떠냐에 따라서 <군주론>의 내용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활용하는 것에 있어서는 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주 깊게 들여다 보면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또한 나중에 <군주론>을 이번에 다시 읽고 적게되는 리뷰에서 쓸 생각이다.
내가 읽을 <군주론>
내가 읽을 <군주론>을 며칠 전에 주문해서 받았다. 내가 십수년 전에 읽고 들고 있었던 책이었던 까치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군주론>이다. 이번에는 주변에 물어보고 산 것인데 번역이 깔끔하다고 한다.
군주론 니콜로 마키아벨리, 강정인 옮김/까치글방 이 책이 원래 내가 갖고 있었던 책인데 절판되었다. |
군주론 니콜로 마키아벨리, 강정인 외 옮김/까치글방 위의 책 개정판이 이 책이다. 그리고 곧 읽을 책이기도 하다. |
사실 내가 까치에서 나온 <군주론>을 십수년 전에 읽었던 것은 까치라는 출판사에 대한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책을 읽을 때는 내가 기억하는 출판사가 까치, 동녘과 같은 책들인지라... 번역자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많이 모르기 때문에 이럴 경우에는 보통 출판사 보고 사는 게 그나마 좋은 번역본을 고를 수 있다.
아직 읽기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십수년 전에 읽을 때랑은 많이 다를 듯 싶다. 그만큼 십수년이 흐르는 동안 생각도 많이 변했고 지식도 많이 쌓았기 때문일 터. 인문/사회팀 토론보다 문학팀 토론이 먼저 있어 다른 책을 먼저 봐야하지만 이번 1월달에는 토론에 참가하기 이전에 토론할 책은 다 읽어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