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사라진 비문을 찾아서'를 읽고 리뷰 형식으로 적는 시리즈 중의 하나로 아래의 글과 연결된 시리즈이다. 제목을 바꾼 것은 이 글의 내용은 리뷰라고 보기보다는 광개토대왕비문 변조설에 대한 내 생각들로만 채워져 있기에 이렇게 바꾼 것일 뿐이다.
Part I 에 이어 Part II 에서는 비문 변조설이 정설이 아닌 데에 대한 내 생각을 얘기할 생각이다. 그렇다고 내가 이 부분에 대해서 깊게 알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비전문가의 입장에서 몇가지 눈에 띄는 부분들에 대한 지적 정도 수준이라 생각하면 되겠다.
이러한 생각을 하는 데에 대해서는 Part I 에 제시된 내용에 대한 고민을 해봐야 하며, 실질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게된 핵심은 Part III 에서 밝힐 생각이다. 여기서는 Part I 의 말미에 제시했던 두 가지 글을 갖고 얘기를 진행한다.
변조설에 대한 새로운 접근, 서예학
[ 참조글 ] "탁본 자료 축적 과학적 접근해야"
위의 글은 한국일보에 난 기사다. 이 기사를 읽어보면 학계에서는 변조설을 정설로 인정하지 않는 부분이다. 변조설이 정설이다 아니다에 대한 것은 사실 내가 뭐라 얘기할 만한 부분은 아니지만 몇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이 있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다.
짤막한 기사다 보니 고구려사 연구자들의 견해를 아주 일부만 옮겨둔 것에 지나지 않아 기사 내용에 언급된 그들의 얘기만 갖고 논한다는 것이 사실 부분만 갖고 얘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얼마 되지 않은 기사의 내용들을 조목조목 따지는 것은 얼마 되지 않으니 그럴 수 있다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기사에 실린 고구려연구회장의 말이다. 사실 책 내용을 읽어보면 김병기 교수님이 비문 전체의 내용을 모르거나 사료에 근거해서 얘기하는 것이 아니거나 역사적인 정황을 파악하지 않고 해석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 하는 이유는?
바로 학계에서 변조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고(기사에서는 근거 없음이 확인 되었다고 단정하고 있다) 변조되었다라고 해도 왜 그것이 입공우(入貢于)가 되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근거가 빈약하기 때문에 그렇게 얘기하는 것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할 것은 변조에 대한 근거를 역사학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볼 지 몰라도 기실 김교수님은 서예학으로 접근했다는 것이다. 역사학 관련 전문가들의 눈에는 그게 안 보이니까 오직 역사학이라는 프레임으로만 문제를 보고 있기 때문이라는 거다.
자 그럼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봐야할 문제가 있다. 서예학이라는 것이 과학적인가? 그럼 나는 오히려 되묻고 싶다. 역사학이라는 것이 과학적인가? 그것은 Part I 에서 두 가지 생각해 봐야할 점으로 충분히 제시를 했다고 본다. 우리가 믿는 과학이라는 것에는 항상 맹점이 존재한다.
자 그런 의미에서 서예학이라는 것으로의 접근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쉽게 이해를 시켜주기 위해 비유적으로 설명해주겠다. 가끔씩 위조된 서명들을 판명할 때 어떻게 하는가? 이 필체는 원본 필체와 획이 다르고 식으로 접근해서 동일인이 쓴 것이 아니라고 판명하곤 한다. 바로 필적감정이 그것이고 이에는 필적감정사라는 전문가가 따로 있다.
자, 이러한 필적감정 매커니즘을 당신은 과학적이라고 믿는가? 아니면 이 또한 비과학적이라고 생각하는가? 좋다. 좀 더 쉬운 선택권을 주겠다. 과학적이든 비과학적이든 이에 대해서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생각해보길 바란다.
서예학으로 비문 변조 가능성을 접근하는 것은 이런 데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비문을 새긴 원래의 필체랑 다른 부분이 있다는 것, 그리고 왜 그것이 다른지에 대해서 책에서 꼼꼼히 밝혀둔 것은 역사학자들의 눈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는가 보다.
그들이 역사학에서의 고증을 들먹거리며 변조설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 어느 정도 들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면 마찬가지로 서예학으로 서체를 통해 비문 변조 가능성에 대한 접근을 한 것에 대해서도 들어볼 만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위의 얘기 중에서 바로 위에 부분이 내가 지적하는 부분의 핵심이다. 글자 한 자 한 자에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서체가 사뭇 다른 부분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고 자기 논리에 맞추어서 풀어 가는 것은 그들이 역사학이 아닌 서예학으로 접근하다 보니 그네들의 눈에는 논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할런지는 몰라도 서예학에서는 논리적인 접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참 이해가 안 가는 것이 변조라는 것에 대해서 얘기를 하려면 도대체 누가 전문가라고 얘기할 수 있겠는가라는 점이다. 변조에 대한 접근이 비과학적이라고 한다면 과학의 모태인 서양에서 조차도 믿고 따르는 필적감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인가? 이런 의미에서 변조에 대한 전문가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서예학자이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릴 적부터 아버지로부터 서예를 배우고 유학 시절에도 서예학을 배웠고 박사 논문에도 서예를 다뤘던 김병기 교수님(현 중어중문학과 교수)의 얘기는 들어볼 필요가 있고 이에 대해서 논할 때는 서예학자들이 좀 더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나 조차도 왜 이 글자가 입공우(入貢于)여야만 하는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다. 다른 가능한 글자는 없었을까? 여러 가능한 글자들 중에서 문맥에 맞는 것을 가리다 보니 입공우(入貢于)가 되었다고는 생각이 되지만 다른 가능성 있는 글자들이 제시되지 않다 보니 여전히 의문이 남는 것이다. 또한 필체가 다른 부분이 신묘년 기사 부분 이외에는 없었는가 이런 부분도 사실 좀 더 보와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광개토대왕릉비의 신묘년에 나오는 기사
[ 참조글 ] 왜가 신묘년(391)에 건너와 백잔을 파하고 신라 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이 글의 앞부분을 읽어보면 광개토대왕릉비에 얽힌 배경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물론 더 자세한 내막이야 ''사라진 비문을 찾아서'라는 책을 보면 더욱 자세히 알 수 있겠지만 말이다. 얼핏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듯 하다. 그러나 몇 가지 지적할 부분이 있어서 얘기하고자 한다.
사실 위의 글은 독서토론에서 나와 치열한 논쟁을 벌였던 로빈님이 참조하라고 독서클럽에 올려둔 것인데, 이 글을 처음 읽고 나서는 별로 기분이 안 좋았다.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마치 자신이 뭐 되는양 하는 생각이 들어 왠지 모르게 건드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마추어적 주제'니 '문제의 본질은 단순하게 봐야하느니' 하는 말투가 왠지 모르게 거슬렸던 것이다.
그런 거슬림 때문에 나는 이 글을 쓴 이에게 내 스타일대로 공격적인 얘기도 서슴치 않을 생각이다. 그에 대한 응수가 있다면 얼마든지 대응해주겠다는 생각 또한 갖고 있다. 그러나 나는 역사학도도 아니고 역사학자도 아니다. 거기다가 서예학자도 아니다. 그냥 단순 관심에 의한 접근일 뿐이다.
어떤 얘기가 나온다 한들 적어도 나는 손해보는 일은 없다는 거다. 틀린 것이 있으면 새롭게 알게 되어 좋은 것이고 어차피 별로 모르는 분야니 가만히 앉아서 지식을 알게 되니 좋다. 왜 내가 이렇게 얘기하는가? 이렇게 얘기해야 나중에 감정이 상하더라도 덜 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이성적으로 논쟁을 한다 하더라도 기분 나쁜 거는 기분 나쁜 거니까. ^^
위의 글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오 이 사람 많이 아네" "맞아 맞아"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만 내가 볼 때는 어린아이가 마치 '너 9 곱하기 8이 뭔지 아니?' 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 핵심에는 시리즈의 마지막인 Part III 에 대한 부분을 이해해야 하겠지만 이 글만 가지고 얘기한다 해도 충분히 왜 내가 그렇게 느꼈는지 얘기해줄 수 있을 듯 하다.
이 글의 얘기들 중에서 고구려의 독자적인 천하관에 대해서는 나 또한 알고 있는 바였다. 배웠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내가 고증한 것은 아니다. 다들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을 나 또한 들어서 알고 있을 뿐이다. 또한 Part I 에서 내가 언급했던 바와 같이 역사에 가감이 있을 수 있다는 부분등에 대한 얘기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니...
그럼 도대체 이 글에서는 뭐가 문제일까? 자. 다음을 보자.
글 초반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리고 형광펜 색칠한 곳을 잘 보기 바란다. 왜 이 신묘년 기사 부분에 대한 해석이 문제가 많은지가 여기에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 글쓴이가 최종적으로 해석한 내용을 보자.
이렇게 해석을 하고 내용만 보면 어이없게 단순하다면서 복잡할수록 단순하게 봐야 문제의 본질을 꿰뚫는다며 스스로 만족하는 듯 하다. 이런 어이없는... 뭐하는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역사학도나 역사학자라면 참 우리나라 역사학계 미래가 정말 암울하다. 어쨌든 첫머리에 신묘년 기사 해석과 마지막에 신묘년 기사 부분을 비교해보자.
똑같네. 단지 끝부분은 더 많은 문구를 해석하다 보니 축약을 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글의 첫부분에서 밝힌 거에 따르면 신공황후의 한반도 정벌은 사실이 되고, 따라서 신공황후가 한반도를 정벌하고 임나일본부를 두어 다스렸다고 하는 일본서기의 내용도 사실이 될 가능성이 높은게 되네? 이해가 안 가는지 모르겠지만 아주 쉽게 내가 이 글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은 순서다.
문제 제기에 위의 첫부분이 들어 있고 결론 부분에 위의 끝부분이 들어 있다. 어이 없지 않은가? 일본에서 주장하는 일본서기의 내용이 사실일 가능성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니... 좋다. 그러나 그런 의도로 적은 것은 아니다. 단지 글쓴이 조차 글쓰면서 그것을 몰랐을 뿐이다. 어찌 적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이다.
문제의 본질을 꿰뚫고 복잡한 문제를 단순히 보다 보니 일본에서 주장하는 내용에 힘을 실어주는 결론이 나버린 거다. 결국 이 글은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서 쓴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다. 게다가 내가 생각하기에는 여기에 있는 대부분의 글들이 철저한 자료 조사나 고증을 거쳤다기 보다는 자기가 들어온 것들을 짜깁기 하면서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결론 부분에 있는 내용이다. 복잡한 문제를 단순히 보면 심플해진다면서 부연설명을 한 부분이다. 이 부분을 보면서 참 많이 어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머리로는 이해를 할 수가 없다. 모순이다. 그것도 이 글 하나만 놓고 봤을 때도 그러니...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이런 얘기를 했을까?
이 글의 참조 사례 부분을 보면 역사에 정치가 개입되는 것을 보여주면서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더니 여기서는 역사에 정치가 개입이 되니까 문제가 복잡해진단다. 허~ 이해를 할 수 없는데. 나 또한 Part I 에서 언급했듯이 기록에는 가감이 들어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그게 역사가 만들어지는 핵심이라는 것을 모르는가? 왜 일본이 일제 치하에서 역사를 왜곡하고 교육을 시켜서 민족의 혼을 말살시키려고 했는지 모르겠는가? 그게 역사다. 그렇게 역사는 쓰여지고 만들어진다. 과거의 역사에는 그걸 당연시 여기면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는 달리 보고 있다니 이 무슨 이유에서인가?
기록에 압력이 들어가는 것은(가감이 되는 것은) 정치가 아니란 말인가? 정치를 어떻게 바라봐야하는 지에 따라 얘기는 다를 수 있겠지만 기록하던 당대에 압력이 들어가는 것이나 지금 무슨 해석이 옳느냐를 두고 정설로서 자기네들의 해석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나 자기가 원하는 대로 기록되고 훗날 사람들이 기억하기를 바란다고 하는 관점에서는 별반 다를 바 없다.
항상 그렇듯 객관적 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과 자기가 1, 2인칭의 입장이 되었을 때는 이렇게 달라진다. 그건 꼭 이런 부분이 아니라 많은 곳에서 볼 수 있는 부분이다. 특히나 글쓰는 사람들에게서는 그렇다. 자기계발 책을 적는 사람이 말은 그렇게 해도 지는 그렇게 못하면서... 뭐 그런 식.
3자의 입장에서 과거의 역사를 볼 때는 정치 개입을 아주 당연하게 여기고, 1, 2인칭의 입장에서 현재 진행중인 역사 해석에 대해서 얘기할 때는 정치가 개입되니 복잡해지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역사에 정치가 개입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이렇게 때에 따라서 달리 해석이 되니 어찌 이 글을 정말 제대로 알고 쓴 사람의 글이라 할 수 있을까? 그냥 아는 척 자기 자랑 글에 지나지 않는다. 공부하는 사람으로서는 이런 자세 정말 바람직하지 않다.
다시 광개토대왕비문으로 돌아가보자. 위의 문구는 문제 제기 부분에서 언급된 것인데 변조설에 대해서는 중국의 역사학자 왕건군의 주장을 상당히 신뢰하는 듯이 보인다. 직접 살펴봤기 때문에 근거없다고 하는 게 더 신뢰가 가는 듯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필 왜 중국 역사학자 얘기를...
우선 여기서 얘기할 부분이 있다. 지금까지 내가 시리즈로 글을 적으면서 변조설이 마치 김병기 교수님 얘기만이 유일한 것처럼 생각하는 일반인들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말이다. 변조설 의혹의 최초 제기는 1972년 이진희 교수(재일사학자)에 의해서 제기되었고 여러 변조설 얘기가 있다. 이는 '사라진 비문을 찾아서' p187~ 197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사라진 비문을 찾아서'의 저자 김병기 교수님 마저도 기존의 변조설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얘기한 부분이니 참조하면 될 듯 하다. 이번 Part II 의 앞부분에 얘기한 바와 같이 변조라는 것에 대해서는 역사학자가 전문가라고 할 수가 없는 부분이다. 역사학자들은 뭘 근거로 변조라고 하느냐라고 하지만 이는 필적감정 결과를 보고 니가 뭔데 그렇게 얘기하느냐와 매한가지다.
새로운 접근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는 좀 더 유념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의문 제기를 통해 서로 소통을 하면서 보완하고 검증해 나가야할 문제를 중국의 역사학자 한 명의 얘기가 설득력 있다 하여 그것을 믿어버리는 그런 오류를 범하는 것은 진실에 대한 접근과는 거리가 멀다. 변조설에 대해서는 이렇게 한 마디 짧은 말로 근거없는 식으로 얘기했으니 하는 소리다.
역사학자들은 변조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아예 그 자체가 있었다 없었다라는 잣대로만 바라보는 것 같다. 물론 나름대로 검토를 해보겠지만 역사학자의 프레임은 그런 식이다. 있다. 없다. 있을 수도 있다는 가정하에 그 내용이 들어볼 만하고 일리가 있다면 그것을 실마리로 보완하고 보강해가면서 우리의 논리를 만들기 보다는 그것은 없었던 일이다. 없었던 일이다라고 치부해버린다.
자신의 영역에서 자신이 모르는 것으로 뭔가를 제시했을 때는 인간 심리상 대부분 거부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할 터이다. 그러나 學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 다산 정약용도 미천한 사람에게 뭔가 깨달음을 얻으면 미천한 사람에게 절을 하면서 좋은 깨달음을 얻게 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는데 말이다.
우리나라 사학자들은 외국 사학자들의 말은 잘 들으면서 우리 내부의 얘기는 잘 안 들으려고 하는 것 같다. 이는 꼭 사학계 뿐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나라 국민의 습성 중에 은연히 그런게 배어 있는 듯 하다. 안에서는 들으려고 하지 않고 밖에서만 들으려는 듯.
마지막 부분이다. 자신도 확언하기는 힘들다는 얘기를 한다. 그건 학계에서도 논란이 많은 얘기니까 당연하겠지. 괜히 그랬다가는 돌 맞으니까. 그러면서 아마추어 주제라고 문제 자체를 비하하고 있다. 아마추어 주제인지 그렇게 생각하는 글쓴이가 아마추어인지 모를 일이다. 무엇이 설득력이 있다는 것을 취하는 것은 개인의 입장이다. 그리고 그 입장이 나랑 다르다고 하여 그것을 폄하할 필요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이렇게 글을 적는 것 또한 글쓴이에게는 상당히 기분 나쁜 일이다. 어찌보면 한 번 읽어보라고 제시했던 로빈님에게 '그래? 한 번 내가 어찌 얘기하는가 봐라' 하는 식의 얘기를 글쓴이에게 다 돌리는 듯하다. 과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어거지로 말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항상 그렇듯 어조가 강하고 다분히 공격적일 뿐.
어떤 논의를 거쳐서 변조설이 근거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났는지는 모른다. 그걸 모르고서 이렇게 얘기하는 것 또한 우스운 짓거리에 지날 수도 있다. 우스운 꼴 당해도 얘기할 꺼는 얘기하고 내가 잘못 알았던 부분이 있었다면 시정하면 되는 것이다. 다만 적어도 내 눈에는 지적할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지적한 것일 뿐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우리 나라 고대사의 한 부분인 삼국 시대에 고구려만 있는 것은 아니다. 광개토대왕비가 고구려에서 만들어진 것이니 고구려 중심의 세계관을 담을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우리 역사에는 고구려 이외에 백제와 신라가 있다. 왜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해석을 하게 되면 고구려사에는 문제가 없을 지 몰라도 우리 나라 역사에는 그닥 도움은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 글 초기에 기사에 대한 내 생각을 적은 부분에서 그네들은 고구려사 연구자들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어떤 해석이 되든 고구려사에 문제가 없으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지는 않았겠지만 고구려만이 아니라 삼국이라는 관점에서 재해석도 해볼 필요도 있다는 점을 얘기하고 싶은 것이다.
역사라는 것이 진실을 밝히는 것이지 어느 나라 편의에 의해서 해석을 해야 하는가 하는 반문을 할 지 모르겠다. 물론 내가 그런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지만 이렇게 얘기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대충은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Part I 과 Part II 라는 글을 통해서 말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Part III 에서 언급할 예정이다.
Part I: 역사를 바라볼 때 생각해봐야할 부분
Part II: 비문 변조설을 정설이 아닌 것으로 보는 입장에 대한 생각
Part III: 역사 왜곡에 대해서 우리가 가져야할 자세
Part II: 비문 변조설을 정설이 아닌 것으로 보는 입장에 대한 생각
Part III: 역사 왜곡에 대해서 우리가 가져야할 자세
사라진 비문을 찾아서 김병기 지음/학고재 |
Part I 에 이어 Part II 에서는 비문 변조설이 정설이 아닌 데에 대한 내 생각을 얘기할 생각이다. 그렇다고 내가 이 부분에 대해서 깊게 알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비전문가의 입장에서 몇가지 눈에 띄는 부분들에 대한 지적 정도 수준이라 생각하면 되겠다.
이러한 생각을 하는 데에 대해서는 Part I 에 제시된 내용에 대한 고민을 해봐야 하며, 실질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게된 핵심은 Part III 에서 밝힐 생각이다. 여기서는 Part I 의 말미에 제시했던 두 가지 글을 갖고 얘기를 진행한다.
변조설에 대한 새로운 접근, 서예학
[ 참조글 ] "탁본 자료 축적 과학적 접근해야"
위의 글은 한국일보에 난 기사다. 이 기사를 읽어보면 학계에서는 변조설을 정설로 인정하지 않는 부분이다. 변조설이 정설이다 아니다에 대한 것은 사실 내가 뭐라 얘기할 만한 부분은 아니지만 몇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이 있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다.
짤막한 기사다 보니 고구려사 연구자들의 견해를 아주 일부만 옮겨둔 것에 지나지 않아 기사 내용에 언급된 그들의 얘기만 갖고 논한다는 것이 사실 부분만 갖고 얘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얼마 되지 않은 기사의 내용들을 조목조목 따지는 것은 얼마 되지 않으니 그럴 수 있다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비문 전체의 내용과 여러 사료에 근거해 당시의 역사적인 정황을 파악한 상태에서 비문 해석에 접근해야지, 글자 한 자 한 자에 의혹을 제기하고 그것을 자기 논리에 맞추어서 풀어 가서는 안 된다. 김 교수는 과거에 재일사학자 이진희씨와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기사에 실린 고구려연구회장의 말이다. 사실 책 내용을 읽어보면 김병기 교수님이 비문 전체의 내용을 모르거나 사료에 근거해서 얘기하는 것이 아니거나 역사적인 정황을 파악하지 않고 해석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 하는 이유는?
바로 학계에서 변조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고(기사에서는 근거 없음이 확인 되었다고 단정하고 있다) 변조되었다라고 해도 왜 그것이 입공우(入貢于)가 되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근거가 빈약하기 때문에 그렇게 얘기하는 것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할 것은 변조에 대한 근거를 역사학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볼 지 몰라도 기실 김교수님은 서예학으로 접근했다는 것이다. 역사학 관련 전문가들의 눈에는 그게 안 보이니까 오직 역사학이라는 프레임으로만 문제를 보고 있기 때문이라는 거다.
자 그럼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봐야할 문제가 있다. 서예학이라는 것이 과학적인가? 그럼 나는 오히려 되묻고 싶다. 역사학이라는 것이 과학적인가? 그것은 Part I 에서 두 가지 생각해 봐야할 점으로 충분히 제시를 했다고 본다. 우리가 믿는 과학이라는 것에는 항상 맹점이 존재한다.
자 그런 의미에서 서예학이라는 것으로의 접근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쉽게 이해를 시켜주기 위해 비유적으로 설명해주겠다. 가끔씩 위조된 서명들을 판명할 때 어떻게 하는가? 이 필체는 원본 필체와 획이 다르고 식으로 접근해서 동일인이 쓴 것이 아니라고 판명하곤 한다. 바로 필적감정이 그것이고 이에는 필적감정사라는 전문가가 따로 있다.
자, 이러한 필적감정 매커니즘을 당신은 과학적이라고 믿는가? 아니면 이 또한 비과학적이라고 생각하는가? 좋다. 좀 더 쉬운 선택권을 주겠다. 과학적이든 비과학적이든 이에 대해서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생각해보길 바란다.
서예학으로 비문 변조 가능성을 접근하는 것은 이런 데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비문을 새긴 원래의 필체랑 다른 부분이 있다는 것, 그리고 왜 그것이 다른지에 대해서 책에서 꼼꼼히 밝혀둔 것은 역사학자들의 눈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는가 보다.
그들이 역사학에서의 고증을 들먹거리며 변조설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 어느 정도 들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면 마찬가지로 서예학으로 서체를 통해 비문 변조 가능성에 대한 접근을 한 것에 대해서도 들어볼 만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글자 한 자 한 자에 의혹을 제기하고 그것을 자기 논리에 맞추어서 풀어 가서는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 위의 얘기 중에서 바로 위에 부분이 내가 지적하는 부분의 핵심이다. 글자 한 자 한 자에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서체가 사뭇 다른 부분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고 자기 논리에 맞추어서 풀어 가는 것은 그들이 역사학이 아닌 서예학으로 접근하다 보니 그네들의 눈에는 논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할런지는 몰라도 서예학에서는 논리적인 접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참 이해가 안 가는 것이 변조라는 것에 대해서 얘기를 하려면 도대체 누가 전문가라고 얘기할 수 있겠는가라는 점이다. 변조에 대한 접근이 비과학적이라고 한다면 과학의 모태인 서양에서 조차도 믿고 따르는 필적감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인가? 이런 의미에서 변조에 대한 전문가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서예학자이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릴 적부터 아버지로부터 서예를 배우고 유학 시절에도 서예학을 배웠고 박사 논문에도 서예를 다뤘던 김병기 교수님(현 중어중문학과 교수)의 얘기는 들어볼 필요가 있고 이에 대해서 논할 때는 서예학자들이 좀 더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나 조차도 왜 이 글자가 입공우(入貢于)여야만 하는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다. 다른 가능한 글자는 없었을까? 여러 가능한 글자들 중에서 문맥에 맞는 것을 가리다 보니 입공우(入貢于)가 되었다고는 생각이 되지만 다른 가능성 있는 글자들이 제시되지 않다 보니 여전히 의문이 남는 것이다. 또한 필체가 다른 부분이 신묘년 기사 부분 이외에는 없었는가 이런 부분도 사실 좀 더 보와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광개토대왕릉비의 신묘년에 나오는 기사
[ 참조글 ] 왜가 신묘년(391)에 건너와 백잔을 파하고 신라 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이 글의 앞부분을 읽어보면 광개토대왕릉비에 얽힌 배경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물론 더 자세한 내막이야 ''사라진 비문을 찾아서'라는 책을 보면 더욱 자세히 알 수 있겠지만 말이다. 얼핏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듯 하다. 그러나 몇 가지 지적할 부분이 있어서 얘기하고자 한다.
사실 위의 글은 독서토론에서 나와 치열한 논쟁을 벌였던 로빈님이 참조하라고 독서클럽에 올려둔 것인데, 이 글을 처음 읽고 나서는 별로 기분이 안 좋았다.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마치 자신이 뭐 되는양 하는 생각이 들어 왠지 모르게 건드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마추어적 주제'니 '문제의 본질은 단순하게 봐야하느니' 하는 말투가 왠지 모르게 거슬렸던 것이다.
그런 거슬림 때문에 나는 이 글을 쓴 이에게 내 스타일대로 공격적인 얘기도 서슴치 않을 생각이다. 그에 대한 응수가 있다면 얼마든지 대응해주겠다는 생각 또한 갖고 있다. 그러나 나는 역사학도도 아니고 역사학자도 아니다. 거기다가 서예학자도 아니다. 그냥 단순 관심에 의한 접근일 뿐이다.
어떤 얘기가 나온다 한들 적어도 나는 손해보는 일은 없다는 거다. 틀린 것이 있으면 새롭게 알게 되어 좋은 것이고 어차피 별로 모르는 분야니 가만히 앉아서 지식을 알게 되니 좋다. 왜 내가 이렇게 얘기하는가? 이렇게 얘기해야 나중에 감정이 상하더라도 덜 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이성적으로 논쟁을 한다 하더라도 기분 나쁜 거는 기분 나쁜 거니까. ^^
위의 글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오 이 사람 많이 아네" "맞아 맞아"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만 내가 볼 때는 어린아이가 마치 '너 9 곱하기 8이 뭔지 아니?' 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 핵심에는 시리즈의 마지막인 Part III 에 대한 부분을 이해해야 하겠지만 이 글만 가지고 얘기한다 해도 충분히 왜 내가 그렇게 느꼈는지 얘기해줄 수 있을 듯 하다.
이 글의 얘기들 중에서 고구려의 독자적인 천하관에 대해서는 나 또한 알고 있는 바였다. 배웠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내가 고증한 것은 아니다. 다들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을 나 또한 들어서 알고 있을 뿐이다. 또한 Part I 에서 내가 언급했던 바와 같이 역사에 가감이 있을 수 있다는 부분등에 대한 얘기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니...
그럼 도대체 이 글에서는 뭐가 문제일까? 자. 다음을 보자.
백잔(百殘)과 신라는 옛적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에 건너와 백잔을 파하고 신라 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중략)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은 저 해석이 옳은가 하는 것이다. 만약 저 해석이 옳다면 신공황후의 한반도 정벌은 사실이 되고, 따라서 신공황후가 한반도를 정벌하고 임나일본부를 두어 다스렸다고 하는 일본서기의 내용도 사실이 될 가능성이 높으니까. 그래서 임나일본부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없는 한국의 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72년 이진희에 의해 비문 조작설이 제기된 이래 끊임없이 그 부분이 논란이 되어 왔었는데...
(중략)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은 저 해석이 옳은가 하는 것이다. 만약 저 해석이 옳다면 신공황후의 한반도 정벌은 사실이 되고, 따라서 신공황후가 한반도를 정벌하고 임나일본부를 두어 다스렸다고 하는 일본서기의 내용도 사실이 될 가능성이 높으니까. 그래서 임나일본부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없는 한국의 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72년 이진희에 의해 비문 조작설이 제기된 이래 끊임없이 그 부분이 논란이 되어 왔었는데...
글 초반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리고 형광펜 색칠한 곳을 잘 보기 바란다. 왜 이 신묘년 기사 부분에 대한 해석이 문제가 많은지가 여기에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 글쓴이가 최종적으로 해석한 내용을 보자.
원래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이었다. 그런데 왜가 와서 백제와 신라를 자신의 신민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이 의로운 군대를 일으켜 배반한 백제를 토벌하고, 법도를 지키지 않는 불의한 왜의 군대로부터 신라를 구원했으니 백제의 왕은 스스로 항복하여 노복이 되기를 청하고, 신라의 왕은 스스로 알아서 조공을 해 오더라.
이렇게 해석을 하고 내용만 보면 어이없게 단순하다면서 복잡할수록 단순하게 봐야 문제의 본질을 꿰뚫는다며 스스로 만족하는 듯 하다. 이런 어이없는... 뭐하는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역사학도나 역사학자라면 참 우리나라 역사학계 미래가 정말 암울하다. 어쨌든 첫머리에 신묘년 기사 해석과 마지막에 신묘년 기사 부분을 비교해보자.
첫부분
백잔(百殘)과 신라는 옛적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에 건너와 백잔을 파하고 신라 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끝부분
원래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이었다. 그런데 왜가 와서 백제와 신라를 자신의 신민으로 삼았다.
백잔(百殘)과 신라는 옛적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에 건너와 백잔을 파하고 신라 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끝부분
원래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이었다. 그런데 왜가 와서 백제와 신라를 자신의 신민으로 삼았다.
똑같네. 단지 끝부분은 더 많은 문구를 해석하다 보니 축약을 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글의 첫부분에서 밝힌 거에 따르면 신공황후의 한반도 정벌은 사실이 되고, 따라서 신공황후가 한반도를 정벌하고 임나일본부를 두어 다스렸다고 하는 일본서기의 내용도 사실이 될 가능성이 높은게 되네? 이해가 안 가는지 모르겠지만 아주 쉽게 내가 이 글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은 순서다.
문제 제기
문제가 된 배경 설명
참조 사례
광개토대왕비문 해석
결론
문제가 된 배경 설명
참조 사례
광개토대왕비문 해석
결론
문제 제기에 위의 첫부분이 들어 있고 결론 부분에 위의 끝부분이 들어 있다. 어이 없지 않은가? 일본에서 주장하는 일본서기의 내용이 사실일 가능성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니... 좋다. 그러나 그런 의도로 적은 것은 아니다. 단지 글쓴이 조차 글쓰면서 그것을 몰랐을 뿐이다. 어찌 적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이다.
문제의 본질을 꿰뚫고 복잡한 문제를 단순히 보다 보니 일본에서 주장하는 내용에 힘을 실어주는 결론이 나버린 거다. 결국 이 글은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서 쓴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다. 게다가 내가 생각하기에는 여기에 있는 대부분의 글들이 철저한 자료 조사나 고증을 거쳤다기 보다는 자기가 들어온 것들을 짜깁기 하면서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에 정치가 개입하면 이렇게 된다. 쓸데없이 복잡하게 꼬이기만 하고 답은 나오지 않고 완전 진흙탕싸움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역사적 진실과는 더욱 거리가 멀어지고. 역사란 역사 자체로서만 볼 때 보다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을 왜들 모르는 것일까? 하긴 알면서도 결국은 저지르고 마는 것이 인간이고 정치긴 하지만 말이다.
결론 부분에 있는 내용이다. 복잡한 문제를 단순히 보면 심플해진다면서 부연설명을 한 부분이다. 이 부분을 보면서 참 많이 어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머리로는 이해를 할 수가 없다. 모순이다. 그것도 이 글 하나만 놓고 봤을 때도 그러니...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이런 얘기를 했을까?
이 글의 참조 사례 부분을 보면 역사에 정치가 개입되는 것을 보여주면서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더니 여기서는 역사에 정치가 개입이 되니까 문제가 복잡해진단다. 허~ 이해를 할 수 없는데. 나 또한 Part I 에서 언급했듯이 기록에는 가감이 들어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그게 역사가 만들어지는 핵심이라는 것을 모르는가? 왜 일본이 일제 치하에서 역사를 왜곡하고 교육을 시켜서 민족의 혼을 말살시키려고 했는지 모르겠는가? 그게 역사다. 그렇게 역사는 쓰여지고 만들어진다. 과거의 역사에는 그걸 당연시 여기면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는 달리 보고 있다니 이 무슨 이유에서인가?
기록에 압력이 들어가는 것은(가감이 되는 것은) 정치가 아니란 말인가? 정치를 어떻게 바라봐야하는 지에 따라 얘기는 다를 수 있겠지만 기록하던 당대에 압력이 들어가는 것이나 지금 무슨 해석이 옳느냐를 두고 정설로서 자기네들의 해석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나 자기가 원하는 대로 기록되고 훗날 사람들이 기억하기를 바란다고 하는 관점에서는 별반 다를 바 없다.
항상 그렇듯 객관적 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과 자기가 1, 2인칭의 입장이 되었을 때는 이렇게 달라진다. 그건 꼭 이런 부분이 아니라 많은 곳에서 볼 수 있는 부분이다. 특히나 글쓰는 사람들에게서는 그렇다. 자기계발 책을 적는 사람이 말은 그렇게 해도 지는 그렇게 못하면서... 뭐 그런 식.
3자의 입장에서 과거의 역사를 볼 때는 정치 개입을 아주 당연하게 여기고, 1, 2인칭의 입장에서 현재 진행중인 역사 해석에 대해서 얘기할 때는 정치가 개입되니 복잡해지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역사에 정치가 개입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이렇게 때에 따라서 달리 해석이 되니 어찌 이 글을 정말 제대로 알고 쓴 사람의 글이라 할 수 있을까? 그냥 아는 척 자기 자랑 글에 지나지 않는다. 공부하는 사람으로서는 이런 자세 정말 바람직하지 않다.
정작 광개토대왕릉비를 직접 살펴보고 조사한 중국의 역사학자 왕건군은 그러한 주장에 대해 근거없다고 결론을 내린 바 있다.
다시 광개토대왕비문으로 돌아가보자. 위의 문구는 문제 제기 부분에서 언급된 것인데 변조설에 대해서는 중국의 역사학자 왕건군의 주장을 상당히 신뢰하는 듯이 보인다. 직접 살펴봤기 때문에 근거없다고 하는 게 더 신뢰가 가는 듯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필 왜 중국 역사학자 얘기를...
우선 여기서 얘기할 부분이 있다. 지금까지 내가 시리즈로 글을 적으면서 변조설이 마치 김병기 교수님 얘기만이 유일한 것처럼 생각하는 일반인들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말이다. 변조설 의혹의 최초 제기는 1972년 이진희 교수(재일사학자)에 의해서 제기되었고 여러 변조설 얘기가 있다. 이는 '사라진 비문을 찾아서' p187~ 197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사라진 비문을 찾아서'의 저자 김병기 교수님 마저도 기존의 변조설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얘기한 부분이니 참조하면 될 듯 하다. 이번 Part II 의 앞부분에 얘기한 바와 같이 변조라는 것에 대해서는 역사학자가 전문가라고 할 수가 없는 부분이다. 역사학자들은 뭘 근거로 변조라고 하느냐라고 하지만 이는 필적감정 결과를 보고 니가 뭔데 그렇게 얘기하느냐와 매한가지다.
새로운 접근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는 좀 더 유념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의문 제기를 통해 서로 소통을 하면서 보완하고 검증해 나가야할 문제를 중국의 역사학자 한 명의 얘기가 설득력 있다 하여 그것을 믿어버리는 그런 오류를 범하는 것은 진실에 대한 접근과는 거리가 멀다. 변조설에 대해서는 이렇게 한 마디 짧은 말로 근거없는 식으로 얘기했으니 하는 소리다.
역사학자들은 변조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아예 그 자체가 있었다 없었다라는 잣대로만 바라보는 것 같다. 물론 나름대로 검토를 해보겠지만 역사학자의 프레임은 그런 식이다. 있다. 없다. 있을 수도 있다는 가정하에 그 내용이 들어볼 만하고 일리가 있다면 그것을 실마리로 보완하고 보강해가면서 우리의 논리를 만들기 보다는 그것은 없었던 일이다. 없었던 일이다라고 치부해버린다.
자신의 영역에서 자신이 모르는 것으로 뭔가를 제시했을 때는 인간 심리상 대부분 거부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할 터이다. 그러나 學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 다산 정약용도 미천한 사람에게 뭔가 깨달음을 얻으면 미천한 사람에게 절을 하면서 좋은 깨달음을 얻게 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는데 말이다.
우리나라 사학자들은 외국 사학자들의 말은 잘 들으면서 우리 내부의 얘기는 잘 안 들으려고 하는 것 같다. 이는 꼭 사학계 뿐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나라 국민의 습성 중에 은연히 그런게 배어 있는 듯 하다. 안에서는 들으려고 하지 않고 밖에서만 들으려는 듯.
이것이 맞는 것인가는 나로서는 확언할 수 없다. 아마추어 주제에 사실이 이렇다 저렇다 단정짓는 것은 주제넘는 무엄한 것이니까. 단지 내가 생각하기에 아무래도 이쪽이 더 설득력이 있고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는 것 뿐이다. 실제로도 그렇지 않은가? 뜬금없는 조작설이나 다른 조금 무리한 해석보다야 이쪽이 훨씬 낫다. 최소한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마지막 부분이다. 자신도 확언하기는 힘들다는 얘기를 한다. 그건 학계에서도 논란이 많은 얘기니까 당연하겠지. 괜히 그랬다가는 돌 맞으니까. 그러면서 아마추어 주제라고 문제 자체를 비하하고 있다. 아마추어 주제인지 그렇게 생각하는 글쓴이가 아마추어인지 모를 일이다. 무엇이 설득력이 있다는 것을 취하는 것은 개인의 입장이다. 그리고 그 입장이 나랑 다르다고 하여 그것을 폄하할 필요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이렇게 글을 적는 것 또한 글쓴이에게는 상당히 기분 나쁜 일이다. 어찌보면 한 번 읽어보라고 제시했던 로빈님에게 '그래? 한 번 내가 어찌 얘기하는가 봐라' 하는 식의 얘기를 글쓴이에게 다 돌리는 듯하다. 과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어거지로 말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항상 그렇듯 어조가 강하고 다분히 공격적일 뿐.
어떤 논의를 거쳐서 변조설이 근거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났는지는 모른다. 그걸 모르고서 이렇게 얘기하는 것 또한 우스운 짓거리에 지날 수도 있다. 우스운 꼴 당해도 얘기할 꺼는 얘기하고 내가 잘못 알았던 부분이 있었다면 시정하면 되는 것이다. 다만 적어도 내 눈에는 지적할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지적한 것일 뿐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우리 나라 고대사의 한 부분인 삼국 시대에 고구려만 있는 것은 아니다. 광개토대왕비가 고구려에서 만들어진 것이니 고구려 중심의 세계관을 담을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우리 역사에는 고구려 이외에 백제와 신라가 있다. 왜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해석을 하게 되면 고구려사에는 문제가 없을 지 몰라도 우리 나라 역사에는 그닥 도움은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 글 초기에 기사에 대한 내 생각을 적은 부분에서 그네들은 고구려사 연구자들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어떤 해석이 되든 고구려사에 문제가 없으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지는 않았겠지만 고구려만이 아니라 삼국이라는 관점에서 재해석도 해볼 필요도 있다는 점을 얘기하고 싶은 것이다.
역사라는 것이 진실을 밝히는 것이지 어느 나라 편의에 의해서 해석을 해야 하는가 하는 반문을 할 지 모르겠다. 물론 내가 그런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지만 이렇게 얘기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대충은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Part I 과 Part II 라는 글을 통해서 말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Part III 에서 언급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