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종합격투기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어 잘 챙겨보지 않다가 저녁 먹기 전에 신문 보다 효도르가 패했다는 걸 봤다. 그것도 파브리시오 베우둠한테. 이렇게 얘기한다고 해서 파브리시오 베우둠이 약한 상대라고 얘기하는 건 아니지만 최고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효도르의 명성에 비할 선수는 아니었기 때문에 다소 의외였다.
경기 후에 효도르가 얘기한 것처럼 실수라 생각한다. 효도르가 무적이고 무패행진을 기록한 선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가 아니라 여러 모로 봤을 때 그렇다. 1라운드 1분 9초 만에 탭 아웃을 했으니 체력의 문제도 아니요, 파운딩 공격을 하는 중에 암바와 트라이앵글 초크를 연이어 당했으니 실수라고 본다.
파브리시오 베우둠: Fabricio Werdum
이전에 효도르와의 대전을 앞두고 있던 크로캅이 그라운딩 기술에 대한 보강을 위해서 영입한 선수가 파브리시오 베우둠이었다.(지금은 브라질의 슈트 복세 소속이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파브리시오 베우둠이란 선수에 대해서 몰랐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찾아보다 보니 그라운딩 기술에서는 꽤나 알려진 선수였었다는...
그러나 단순히 코치를 해주는 선수가 아니라 실제로 종합격투기 무대에서도 뛰는 선수이기에 그를 주목하고 경기를 봤는데 그닥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지루하고 재미없는 경기를 하는 선수였기 때문이다. 물론 주짓수 베이스의 선수들이 대부분 그러하긴 하다. 요즈음에는 눈에 띄지 않는 히카르도 아로나, 최근 KO패를 두 번씩이나 당한 안토니오 호드리고 노게이라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당시 안토니오 호드리고 노게이라처럼 효도르를 제외하고 누구에게든 이기는 선수도 아니었기에 내 눈에서 벗어난 선수였다. 실력은 있지만 그다지 팬이 되고 싶지는 않았던 선수. 일전에 노게이라와의 대전에서 둘의 그라운딩 싸움이 어떻게 될까 무척 궁금해서 봤었는데 막상막하에 서로 견제를 엄청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서로 주무기가 같기 때문에 자신의 주무기로 싸우다 지게 되면 쪽팔려서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었던 경기였다. 그래도 노게이라와의 경기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그라운딩 공격을 하려고 했던 것은 파브리시오 베우둠이었다. 물론 견제도 하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좀 더 적극적이었던 듯.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얘기였겠거니.
사실 파브리시오 베우둠과 경기할 때는 그라운드로만 가지 않으면 된다. 그라운드에 누워 있는 베우둠을 따라 갈 필요 없이 일어서라 하고 또 타격 위주로 공격을 하다 보면 생각보다 쉽게 베우둠을 무너뜨릴 수 있는데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베우둠이 그라운딩 기술 이외에 타격 기술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타의 파이터들에 비해서 타격 기술이 우월하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이번 효도르와의 대전에서 이겼다고 해서 그가 효도르와 같은 레전드급의 선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월드컵 16강에서도 보이듯이 단 한 번의 승부로 승패가 갈리는 경우에는 그 누구도 질 수가 있는 법이다. 다만 지금까지 효도르는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단 한 차례의 패배도 없었다는 점이 그를 레전드급으로 만들어준 요인이 되긴 했지만...
단 한 번의 승리로 효도르가 가진 명성을 가지진 못하겠지만 효도르의 무패 행진을 종결시킨 장본인이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게 되는 이득은 톡톡히 봤다 하겠다. 문제는 이제부터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얘기가 달라질 듯. 이번 효도르와의 대전은 알리스타 오브레임 챔피언 도전전이기 때문에 다음 경기는 리매치가 아니라 알리스타 오브레임과의 타이틀 매치가 되겠다.
알리스타 오브레임. 많이 컸네. Pride FC에서 미들급으로 활동하다가 헤비급으로 체급을 올리고 난 이후로 여러 면에서 단점을 많이 보강하고 발전하고 있어 예전에 알리스타 오브레임을 한 차례 이겼던 파브리시오 베우둠이라고 해도 잘 준비해야할 듯. 개인적으로는 알리스타 오브레임이 이번 경기를 보고 그라운딩 싸움은 가급적 피하려고 할 듯 한데...
어쨌든 이번 경기로써 파브리시오 베우둠은 에밀리아넨코 효도르의 주변 인물들은 다 꺾은 셈이 된다. 효도르의 동생인 알렉산더, 효도르의 스파링 상대인 로만 젠소프 모두 베우둠에게 무릎을 꿇었다. 한 때 내가 좋아했던 선수였던 러시아의 세르게이 하리토노프에게는 졌지만 세르게이 하리토노프는 같은 러시아인이라도 효도르와는 다른 축에 있는 선수였으니 제외.
에밀리아넨코 효도르: Fedor Emelianenko
인터뷰에서 얘기했듯이 실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은 아닌가 하는 걸 스스로 되뇌일 필요는 있다고 본다. 사실 이번의 파운딩 공격은 예전에 안토니오 호드리고 노게이라와의 대전과 비슷한 양상이었다. 노게이라에게는 통했는데 베우둠에게는 안 통했다. 그만큼 베우둠이 준비를 잘 해서 효도르의 파운딩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면서 역공을 했다는 얘기도 될 수 있겠지만 1라운드 1분 9초라는 아주 짧은 시간에 당한 만큼 너무 방심했지 않나 싶다.
그래도 경기에 지고 나서도 끝까지 경기장에 남아 인터뷰까지 응하는 모습을 보면서 역시 최고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선수라는 걸 실감케했다. '질 수도 있지 뭐.' 하는 그런 초연한 모습. 지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선수이기에 더욱더 그런 모습이 멋져 보였던 듯.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효도르가 아무리 초연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속에서는 리벤지를 고대하고 있을 듯 싶다.
예전에 피부가 찢어지는 바람에 닥터 스톱으로 첫 종합 격투기 패배를 안겨줬던 코사카 츠요시와의 리벤지, 일본에서는 유도 영웅이지만 하는 꼬락서니가 다소 가벼워 벼르고 있던 오가와 나오야를 상대하던 효도르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마도 리벤지 매치가 성립이 되면 베우둠은 아마 엄청 두들겨 맞지 않을까 싶다. 최고의 선수라고 한다면 한 번 졌기 때문에 진다는 두려움에 휩싸이기 보다는 다음 번에 멋지게 승리하겠다는 생각을 갖기 마련이다.
노게이라가 멋진 이유도 그렇다. 지고 나면 많이 억울해하긴 하지만 그만큼 또 열심히 해서 리벤지를 하곤 하는 독종이다. 스타일은 전혀 다르지만 효도르는 초연한 모습으로 매너 좋게 대하다가 다음 리벤지 때 이전 패배는 실수였다는 것을 톡톡히 보여주려고 생각할 듯.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리벤지 매치를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경기 후 인터뷰: Interview after Match
파브리시오 베우둠은 좀 들 떠 있었다. 그래도 파브리시오 베우둠은 효도르가 세계 최강이며 언제든지 리매치에 응할 생각이 있다고 얘기했고 효도르는 다음과 같은 아주 멋진 말을 남겼다.
"The one who doesn't fall doesn't stand up"
넘어지지 않는 자는 일어서지 못한다. 의역하자면 실패없이 성공할 수 없다.
넘어지지 않는 자는 일어서지 못한다. 의역하자면 실패없이 성공할 수 없다.
인터뷰어가 표현했듯이 위대한 챔피언(Great Champion)이라 할 만하다. 파운딩에 집중해서 실수를 했는데 어떻게 되었는지는 면밀히 분석할 예정이라는 말과 함께 리매치에 대해서도 언급을 했다. 리매치. 나도 기대된다. 어떻게 나올지 예상되긴 하지만 말이다. 다음번 리매치에서는 베우둠은 참 많은 준비를 해야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