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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독서

달라이 라마와 도올의 만남 (전 3권)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3
김용옥(도올) 지음/통나무

아래 내용은 2003년 10월 27일 읽고 정리하면서 쓴 글이다. 인용과 내 개인적인 생각들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이라면 책을 보기를 바란다.

1권과 2권은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이유는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대화 내용이 없는 기행문이기 때문이다. 사실 인도의 문화나 인도의 역사 그리고 불교 유적지에 대한 탐방등에 대해서는 사실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는 것을 읽은 이유는 도올이 적은 글들 하나 속에는 깊은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 기대 심리 때문이다. 그 기대는 3권에서 충족이 되었다. 앎에 대한 기대 말이다. 또한 앎으로서 얻게 되는 기쁨에 대한 기대 말이다.

3권에서는 달라이 라마도올의 대화 내용이 대부분이다. 도올 선생의 지식의 깊이에 다시 한 번 놀랐고 스타일(?)이 다른 두 사람의 대화 내용에서 불교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는 책이었다. 만약 이 책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고 한다면 3권만 봐도 될 듯 하다.

두 사람의 스타일이 다른 이유는 도올은 폭이 넓은 프로 지식인이고(정말 도올이라는 사람의 인간됨이 어떠하든지 간에 이러한 점은 정말 감탄할만 하다.) 달라이 라마는 종교인이다. 즉 다른 지식에 대해서는 무지에 가깝다고 할 수도 있지만 종교인이고 또한 불교 철학에 대한 이해가 깊은 지라 수용에 대한 자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에 대한 배경등에 대해서는 1997년도에 제작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쿤둔'이라는 영화를 통해서이다. 그 외에는 사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거의 없다 해도 무방하다. 책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은 달라이 라마노벨 평화상 수상자라는 객관적 사실 하나다. 그러나 그가 누군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가 여기서 가장 유심히 본 것은 바로 그들의 대화다. 문답 형식의 서로 간의 논지를 펴는 그들 간의 대화 속에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내가 기억할 만한 것들만 3권에서 발췌하여 정리하거나, 내 생각을 정리한 것이다. 이 정리는 나를 위한 것이지 남을 위한 것이 아니므로 참고만 하기 바란다.

3권 p582

불교는 무신론이다!

유신론의 전제는 반드시 이 세계에 대하여 이 세계 밖에 있는 창조주를 설정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의 구원도 인간 밖의 구세주를 설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불교는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으며, 구세주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과 우주 밖에 있는 초월적 존재자로서의 신의 개념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맥락에서 불교는 분명한 무신론이다.

3권 p646

그럼 불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유신론의 형상화가 아닌가?

대승불교는 대중에게 불타의 참 가르침을 전하는데에 중점을 두고, 소승불교는 개인의 수양에 초점을 맞추는데, 대승불교에서 불상을 도입하면서부터 엄청난 대중운동으로 발전, 도약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기는 했지만, 그러한 계기를 통해서 자멸의 길을 걸었다고 할 수도 있다.

즉 불교의 진면목은 무신론이었는데, 불상을 도입하면서 오히려 유신론으로 전락해버렸다는 것이다. 불상숭배를 중심으로 한 대승불교에 대한 일반재가신도들의 불교 이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고 천당에 가고자 하는 유일신관과 별 차이 없는 모습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일반 신도들의 불상에 대한 집착은 현실적으로 불타를 중심으로 한 일신교 사상이라 말해도 하등의 변명이 있을 수 없는 수준으로 불타를 유신론화 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는 종교가 아니다.

책의 내용을 빌어서 얘기하면, 달라이 라마가 종교 의식을 집행할 때는 그의 얼굴을 보려고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다고 한다. 달라이 라마라는 존재가 무엇이길대 그렇게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일까? 달라이 라마 자신이 자신을 설명한 부분을 보면 달라이 라마는 제도라는 것이다. 오래 전부터 내려온 달라이 라마라는 제도 속에서 자신이 선택이 된 것이고 그 제도 속에서는 자신이 달라이 라마라는 것일 뿐 자신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가 시사하는 바처럼 사람들은 어떠한 누구에 대한 신앙 믿음 그리고 갈망을 꿈꾸는 것이다. 불상이라는 것은 결국 부처라는 것의 형상화인데 부처라는 위대한 구원자라는 개념이 결코 아니라 부처를 보고 싶어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부처를 형상화 하기 위해서 불상을 만든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대승불교요 그것이 불교의 대중화에 엄청난 반응을 일으킨 것이라는 것이지 불상이 곧 불교를 우상화한 신이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지금껏 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다. 할머님도 아버님도 어머님도 기독교다. 물론 동생도 마찬가지요. 친가 쪽은 죄다 기독교라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왜 이렇게 불교라는 것에 집착하는가 하는 것은 기독교가 불교보다 덜하다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난 기독교의 폐단을 많이 봐왔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기독교라는 종교 자체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기독교가 중요하듯이 나 또한 나에게는 불교라는 종교가 아닌 학문, 사상이 중요한 것이다. 고로 내가 기독교를 인정하듯이 그들 또한 불교를 인정해야 하는데 그들은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면 유일신 사상이기 때문이다.

불교는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책에서 얘기하듯이 자신의 수양하기 위한 하나의 체계이지 그것이 종교일 수가 없는 것이다. 불교는 자신을 수양하기 위해서 수천년동안 쌓아온 노하우들이 경전이라는 형식으로 전해져올 뿐이지 기독교와 같은 성경과는 내용이 다르다는 것이다.

3권 p665

절대적 진리는 없다!

절대적 진리는 없다. 물론 불경에 보면 절대적이고 영원한 진리, 이따위 말들로 가득차 있다. 그런데 이런 말들을 사람들이 매우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불타의 깨달음이 연기인 한에 있어서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영어로 Absolute Truth 라고 말할 때 이미 우리는 그 말이 지닌 역사적 인식의 포로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마치 절대적 진리가 없으면 살 수 없는 것처럼, 그리고 이 우주에는 절대적인 그 무엇이 꼭 있어야만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어떤 공포감이나 중압감의 포로가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유일신론적 사유가 지어낸 서구적 발상의 일대 오류다.

이 우주에는 절대적 진리가 있으며 그 절대적 진리를 매개하는 절대적 지식이 있다. 이 절대적 지식 즉 Gnosis(영지)를 얻기만 하면 우주의 모든 신비를 풀 수 있는 열쇠를 얻을 수 있다. 이런 따위의 사유는 이미 절대적 진리나 절대적 지식을 실체화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류의 절대론이 모든 신비주의의 함정이다. 이것이 서구 신비주의의 한계다.

'절대적 진리'라는 말 자체를 곰곰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그냥 절대적이라는 말을 우상화해버린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진리라는 것이 모든 상대적인 관계를 단절시키는 절대독립적인 실체일 수 있을까?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의 찰나일 뿐인데, 이 잠깐동안의 삶에 있어도 애타게 절대에 집착을 해야 하는가? '대반열반경'에 나오는 석가여래의 마지막 말은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 한마디가 그의 전 생애를 마감하는 최후의 일성이다.

불교에 있어 구태여 절대적 진리를 말하자면 '공'이라는 말 한마디 밖에 없다. 그러나 공이라는 것을 또 하나의 저대적 실체로 생각하면 그것은 '공'이 아니다.

3권 p668

그럼 공은 무엇인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조차도 고전물리학에 속한다.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는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말은 그의 고전물리학적 사유를 대변한다 할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고전 물리학의 시간과 공간의 개념은 바꾸었지만 물리현상의 기술방식을 바꾸지 않았다. 힘이니 운동이니 가속도니 하는 그러한 기본개념장치를 바꾸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양자역학에 오면 위치와 속도 그 자체가 불확정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물체에 대한 이해자체가 파동함수의 기술로 바뀌게 된 것이다. 불교적 사유는 이러한 불확정적 세계관에 더 가깝게 올 것 같다. 궁극적으로 궁극적으로 비존재는 없지만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공이다.

공에 대한 개념 그리고 불교가 무신론이라는 것에 대한 많은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연기라는 것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연기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책 내용 전반에 대한 탐독을 해야 하는데, 연기라는 것에서는 도올 선생 마저도 달라이 라마에게 배웠다는 점에서 어떠한 이 책을 읽을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

3권 p679

불교는 심리학이다.

도올 : 불교는 심리학이다. 그러면 심리학의 궁극적 목표는 무엇인가?
라마 : 그것은 마음의 평화다.

도올 : 마음의 평화란 열반(Nirvana)을 의미하는 것인가?
라마 : 그렇다.

도올 : 그러면 그것은 존재가 아닌가?
라마 : 그것은 분명 존재가 아니다. 열반에 들었다고 하는 표현은 열반이라는 존재가 있고, 그 존재 속으로 내가 들어간다는 의미는 아닌 것이다. 열반은 어떠한 경우에도 서양 철학에서 말하는 존재론적 실체(ontological entity)일 수 없다.

도올 : 그럼 열반은 무엇인가?
라마 : 그것은 마음의 상태(state of mind)이다.

도올 : 열반이 마음의 상태라고 규정한다면, 우리가 열반적정의 마음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면 번뇌도 곧 보리가 되는 것이므로, 윤회도 사라져버릴 것이 아닌가?
라마 : 그렇지 않다. 어떠한 마음의 상태에 이르든지 간에 그 마음의 상태가 윤회하는 것이다. 윤회하는 것은 마음이다.

도올 : 그렇다면 열반이 해탈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라마 : 열반이 해탈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열반은 무주처열반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깨달음의 세계에서도 미망의 세계에도 안주하고 있지 않다. -> 이것이 대승 보살의 정신

3권 p687

연기적 자아란?

연기란 한마디로 무자성이라는 뜻이다. 무자성이란 자성의 법이 인정이 되지 않는다는 말인데, 그것은 결국 모든 존재는 서로 의존하고 있으며(interdependency) 상호 관련되어 있다(interconnectedness)는 뜻이다. 이러한 상호의존성, 상호관련성을 불교에서는 공이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불교에서 말하는 공은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의 無가 아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항상 거기에 있는 것이다.(something there) 무아라고 하는 뜻은 我라는 존재의 소멸을 의미하거나 나의 완전한 무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에 대한 이해방식의 근원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마음의 소멸이 아니라 마음의 혁명이다. 혁명이란 마음이 새로워진다는 것이다. 그러한 마음의 혁명을 불교는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이후의 대화에서 도올 선생의 공격(?)이 시작된다. 윤회라는 것과 해탈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모순된 논리에 대한 질문과 라마의 답변에 대한 얘기들이 이어진다.

3권 p693

불교는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말한 뜻은, 종교가 서양에서처럼 창조주나 이 우주의 모든 운행을 관할하는 지배자로서의 초월신의 존재를 전제로 해야만 한다면, 그러한 맥락에서의 종교는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한 것이다. 즉 종교의 성립요건에 창조주나 초월신의 개념이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종교에 가장 본질적인 주제는 '신'이 아니라 '죽음'이다.

이 이후부터의 대화는 프로지식인 도올 선생과 달라이 라마의 아주 치열한 대화가 벌어진다. 도올 선생의 지식과 종교인의 한 판 승부라는 것이다. 아주 재미있다. 도올 선생이 생각하기에 달라이 라마가 즉 종교인(불교를 종교라는 관점에서)의 모순점을 실랄하게 파헤치기 시작한다. 그러나 정-반-합 의 과정을 거치는 것 또한 대화 속에서 엿볼 수 있다. 역시 도올이다.

여기에서도 보이듯이 종교의 근원을 따져보면 그것은 신이라는 유일한 존재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인간의 죽음에 대한 고찰에서 부터 파생된 것이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경험해 보지 않고는 알 수가 없는 것이므로, 죽음에 대한 고찰에서 부터 내세 사상이나 토속 신앙이 생기게 되었고 죽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는 것들을 살아 있으면서 좀 더 바른 삶을 살아나가라고 하는 가르침으로서 승화시킨 것이라는 것이다. 허나, 지금의 종교들은 돈벌이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 자본주의 하의 종교일 뿐. 종교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이 글을 적는 오늘도 어느 교회를 지나왔다. 물론 그 교회는 우리 부모님이 믿는 종교와는 다른 분파다.(기독교도 분파가 많다.) 그 교회가 하도 커서 한마디 했는데 옆에 있는 친구가 하는 말을 들으니 이건 교회가 아니라 사기꾼 집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듯 많은 종교인들 중에는 그것이 돈벌이 수단에 지나지 않는 하나의 사업이요 더욱더 큰 일은 많은 신학도들이 그들 자신은 바른 길을 살아간다고 하고 있긴 하지만 그들 자신을 돈벌이 수단으로서 종교를 이용한다는 의식을 하지 못하는 無知가 더 우스울 뿐이다.

내 집안에는 기본이 집사요. 장로님과 목사님도 계신다. 허나, 나는 그들에게 별 말을 하지 않는다. 친척이라서가 아니라 얘기가 안 통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영생교를 보고 저 미친 놈들 하는 것과 같이 나 또한 그들에게 그런 소리를 할 수도 있지만 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이 믿으면 그만이다 그것이 기독교의 가장 핵심 교리다!-물론 내 생각이다.- 그래. 믿으면 그만 아닌가! 내가 불교를 좋아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여 한 가지만 지켜라. 자신이 믿는 것이라고 강요하지 말지어다. 절대 윽박지르지 말지어다.

이 책을 통해서 또 알게 된 사실 하나는 불교에서 사리라고 불리는 것이 많을 수록 더 열반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는 것에 대한 실체이다. 도올 선생의 말에 의하면 이것은 고정적인 자세, 똑같은 자세로 오래 가만히 있으면 생기는 것으로 시장 바닥에서 오래동안 같은 자세로 물건을 파는 사람들도 사리는 생기는 것이 이러한 이유라는 것이다. 즉, 수행이라는 것을 하면서 오랫동안 고정적인 자세로 있는 시간이 많을수록 사리가 더 나온다는 것으로 결코 이것이 어떠한 열반에 이르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의 내용 중에서 3권은 정말 볼 만하다. 그리고 많은 것들을 알 수 있는 책이다. 불교라는 것으 무턱대고 신봉하는(친인척이 불교면 자신도 불교를 믿게 되는 그런) 자들이면 한 번 읽어보길 바란다. 난 내 주변 환경은 기독교다. 허나, 솔직히 기독교라는 것보다는 불교가 나에게는 매력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에게는 종교로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수양을 위해서일 뿐이다. 스님을 존경하지도 않고, 부처를 위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난 불경에 쓰인 그 글들 속에서 나오는 수천년동안 쌓아져온 사상을 위대하다 생각할 뿐이다.

내가 기독교를 싫어하는 것은 기독교의 가장 뿌리를 찾아가 보면 결국 예수라는 사람으로 귀결이 되고 그는 신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전제로 하는 어떤 전제가 성립하기 때문에 그 전제 자체를 뒤바꾸기 싫어하는 기독교인들을 싫어한다. 전제에 대한 고찰 없이 단순히 예수님이 어찌 어찌 그것은 내가 볼 때는 아주 큰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예수도 인간이다. 그리고 인간은 누구나 똑같다. 단지 상황에 따라 자신이 보는 것이 달라질 뿐이다. 난 우매한 사람이 되기는 싫었다. 그리고 뭐든지 난 내 의지대로 믿고 내 의지대로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가 싫다. 싫다고 비판하고 싶지는 않지만 비판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나도 인간이기 때문이다.

지금껏 나는 진리라는 것은 절대적이다라고 했고 불변한다고 믿어왔다. 허나, 이 책을 통해서 조금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달라이 라마의 말이 설득력은 있지만 그렇다고 달라이 라마 성하가 무엇이길래 내 인생의 가치관을 바꾸게끔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것은 그가 나보다 덜하다는 관점이 아니라 누구 말을 듣고 쉽게 바꾸는 사람이 되기 싫기 때문에 좀 더 깊은 사색을 해 봐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진리는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고 어떠한 시대적 제도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것을 난 진리라고 한다. "살인을 하지 말라" 누구나 아는 그러한 것들 말이다. 일단 좀 더 많은 생각을 해 봐야 할 듯 하다.

최근에 광개토대제를 읽으면서 7권을 잃어버려 이 책을 읽게 되었는데, 3권은 정말 재밌게 읽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말이다. 하루 만에 다 읽은 것 같다. 이런 책이 주는 앎에 대한 즐거움과 기쁨은 많은 현실적인 어려움과 현상들 그리고 상황들을 보는 눈을 다르게 해주는 듯하다. 그래서 난 책이 좋다. 이제는 책도 골라서 빌려 보긴 하지만... 그래도 한동안 영화 보느라고 못 읽었던 책들을 하나씩 읽어나가면서 많은 마음의 평온함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