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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내려가서 일을 끝마치고 친구를 기다리다가 다음에 부산에 내려가면 꼭 시간 내서 뵙겠다고 마음 먹었던 이해문 은사님께 카톡을 보냈다. 이리 저리 스케쥴을 맞춰보니 다음 날 점심 때가 가장 적절해서 이튿날 점심 때 뵙기로 약속하고 은사님이 계시는 하단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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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있는 곳은 해운대, 내가 머문 곳은 사직동, 은사님을 뵙기로 한 곳은 하단. 물론 지하철로 이동하면 되긴 하지만, 태원이 덕분에 편하게 왔다 갔다. 사직동에서 하단으로 데려다주고, 하단에서 은사님과 점심 먹는 동안 대기하고 있다가 또 해운대까지 바래다주고, 해운대에서 일 끝마치고 나니 또 픽업하러 와주고. 이렇게 얘기하면 다른 이들은 꼬붕이가? 이렇게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절대 그런 게 아닌데. 어느 친구가 이렇게 해줄까? 그럴 필요없다고 해도 그렇게 해준다. 그러면서도 미안한 생각 갖지 않게끔 배려하고. 불편하지 않게 대해주고. 정말 이런 친구 드물다. 돈보다는 의리, 신뢰 이런 걸 중시하는 친구. 나랑 코드가 잘 맞긴 해도 내가 너무 받은 게 많아서 미안하다. 살면서 내가 도움이 되는 일이 분명 있겠지 해도 이 녀석은 또 남의 도움은 잘 안 받아요. 그냥 우린 친구 아이가로 끝. 그래서 주변에 그런 친구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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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장소에 조금 일찍 도착했는데, 차에서 보니 은사님이 서계시는 게 보인다. 내리면서 "선생님!" 불렀더니 반갑게 웃으면서 맞아주신다. 악수하고, 한 번 껴안고. 정말 반가웠다. 내 학창 시절에는 상당히 키도 크고 핸섬하신 젊은 수학 선생님이셨는데(내 중학교 3학년 때는 담임이셨다.) 나이 들어서 뵈니 그리 커보이지는 않더라. 아무래도 내가 고등학교 때 키가 많이 커서 그런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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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남짓 점심을 먹으면서 대화를 했다. 이런 저런 얘기. 못 보고 지낸 기간에 비해 무척이나 짧은 시간이었지만, 또 보면 되니까. 그래도 은사님도 동창들 중에 기억하는 애들이 있었다. 공부를 잘 하거나 학교에서 회장을 하거나. 그런데 대부분은 어렸을 때라 하더라도 성향 자체가 직장인이나 공무원, 의사 뭐 그런 식이라는 게 눈에 보였던 반면, 나는 좀 틀렸던 모양이다. 은사님께 기억에 남는 제자는 두 명이 있다고 한다. 한 명은 나고 다른 한 명은 나보다 후배. 물론 그 후배가 나보다는 잘 나가겠지. 이미 나는 그런 부분에서는 초월한 녀석이니까. 아니. 초월했다기 보다는 한 번의 기회에 치고 올라가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해야 정확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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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마지막에 얘기하셨던 은사님. 자신있지만 시간이 좀 걸릴 거 같다고 답했던 나. 사람이라는 게 그렇다. 모르면 몰라도 알면 쉽게 하지 못하는 법이다. 어렸을 적에도 실수를 안 했던 건 아니지만 내가 가진 기질이 바른 방향을 지향했고, 나이가 들수록 아는 게 많아지다 보니 참 돈 벌기가 쉽지 않다. 나는 모르면서 행하면 무식하다 하지만 알면서도 행하면 그건 사기라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내 가치를 지켜가면서 돈을 번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번 부산 출장 때 의동생은 나더러 장인이라 불렀다. 장인. 돈을 많이 준다 하더라도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장인. 나는 그런 정신을 매우 높게 평가하고 그런 사람이 되고저 했다. 그러나 나이를 들면서 점점 생각이 달라진다. 과연 내가 가는 길이 옳은 길인가? 내가 만약 이렇게만 한다면 내가 저 정도 못 할까? 어차피 남들은 이렇게 해도 결과론적으로 돈만 많으면 그 사람이 최고라고 하는 미련한 족속들 아닌가? 뭐 그런 여러 생각들. 그런 고뇌와 갈등이 나의 내적 성장에는 도움이 될 지언정 정작 현실적인 문제의 해결에는 도움이 안 된다. 그래서 가끔씩 나는 내가 무식했으면 좋았을껄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모르면 이런 고뇌와 갈등을 할 필요가 없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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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깜냥이 이것 밖에 안 되면 그것으로 끝이겠지. 그러나 나는 기다린다. 기회가 오길. 언젠가 딱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지면 그 때서야 내 모든 걸 쏟아부어서 뭔가를 보여주겠노라고. 지금은 준비 기간일 뿐이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을 뿐이라고. 그러나 그 때가 멀지는 않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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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차를 타고 해운대 가는 길에 옛 추억이 담긴 장소를 아이폰에 담았다. 동대 입구라고 하면 다들 알만한 그 장소. 동대 입구라고 하여 대학생들만의 거리가 아니다. 중학생부터 대학생까지 모여들었던 장소. 지금은 예전과는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내 중학생 시절에도 있었던 향학서점은 아직도 있더라. 신기했다. 다른 것들은 다 변했는데, 향학서점만큼은 그 자리에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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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부산 출장 때는 일도 일이지만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하고 또 느끼고 돌아온 것 같다. 앞으로 부산 내려가면 일 외에도 시간을 좀 할애해서 옛 친구들이나 은사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좀 가지려고 한다. 예전에는 일만 하고 올라오고 그랬는데 그런다고 해서 일이 더 잘 되고 그런 것도 없다. 오히려 옛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이런 저런 걸 느끼는 게 훨씬 더 도움이 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