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영화 매니아라면 봐야할 영화 100편>의 39번째 영화이자
<죽기 전에 꼭 봐야할 영화 1001편>의 232번째 영화다.
정말 정말 힘들게 보았다.
올해(2007년) 들어서 본 영화 중에서 2점짜리를 기록한 두번째 영화다.
첫번째 영화는 <다세포 소녀>였다.
이 영화를 <다세포 소녀> 수준의 점수를 준다는 데에 아마도
많은 평론가들은 이렇게 얘기할 것이다. "영화의 映자도 모르는 넘"
그렇게 불러도 좋다. 나는 내가 보는 영화 기준이 있다.
그것은 다음 글을 꼭! 확인하기 바란다.
<영화 평론에 대한 단상>
난 평론가가 아니다. 평론으로 밥 벌어먹고 사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간접경험이고 감흥이다.
카타르시스와 같은 전율을 느끼거나 삶에 피폐해진 내 양식을 돌리기 위함이고
취미로 즐거움을 얻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이런 나의 영화 목적에 부합하지 않았던 영화였다.
개인적으로 짐 자무쉬 감독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영화 세계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것을 왜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영화 평론가들은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그러면서 <트랜스포머>같은 영화에는 평점이 인색하다.
그들은 재미가 없었나 보다. 그럼 항상 예술 영화만 보고 살던지...
사실 나는 영화를 보기 전에 줄거리나 평을 잘 읽지 않는다.
본다고 한다면 평점 점수 정도...
높은 평점이라 해도 난 맘에 안 들면 안 드는 거다.
나름 기대를 했었던 것은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길>이라는 작품 때문.
네오리얼리즘이니 뭐니 난 솔직히 잘 모르고 관심도 없다.
그것은 영화를 전공하는 사람에게나 필요한 것이다.
그들이 내가 전공한 제어관련 공식이나 이론의 발전 과정에 대해서 알고 싶겠는가?
굳이 관심이 없으면 알 필요가 없는 것들이다.
영화만을 위한 영화는 보고 싶지가 않다.
이 영화는 적어도 내게는 그런 부류의 영화였다.
뭔 말인지 도대체가 알 수가 없다.
나름 명작이라고 불리는 영화들 중에는 간혹 이런 영화들이 있어서
조심스레 보았는데 초반부터 현실과 환상을 오고 가며 뭔 소리를 하는 것인지
헷갈리고 정신이 산만해진다.
2시간 15분이라는 러닝 타임이 이토록 지겹고 힘들 줄이야.
끝까지 보겠다는 신념(고집이라고 해야겠다.)으로 견뎠다.
그리고 예전에 모아둔 평론가의 글을 읽으면서(아래에 있다.)
어느 정도 '오~ 이게 그런 뜻이었구나!' 라는 생각은 든다.
그렇다고 평점을 좋게 못 주겠다. 난 평론가도 아니고 영화학도도 아니다.
내 느낀 그대로 평점을 줄 뿐이다. 단지 영화를 좋아하는 매니아일 뿐.
만약 내 말을 못 믿겠으면 한 번 직접 보기를 바란다.
정말 대단한 영화인지 아니면 정말 보기 힘든 영화인지.
할 말이 없다. 뭔 말인지를 몰라서 말이다.
나름 주인공이 영화감독이라서 펠리니 자신에 대한 자전적인 얘기인가
하는 생각으로도 영화를 유심히 봤지만 너무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속에서
뭘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마지막 부분에서의 대사에서 힌트 아닌 힌트를 얻기는 했지만
평론가의 평들과는 전혀 다른 나만의 해석이 되는...
어쨌든 영화보는 내내 힘들었다. 그리고 난 이 영화 명작이라 생각치 않는다.
* * *
다음은 변재란이라는 영화평론가의 評이다.
이탈리아 영화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네오레알리슴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8과 1/2>은 <무방비도시>등 네오레알리슴의 걸작 대본을 도맡아 쓴 페데리코 펠리니와 그 네오레알리슴의 결별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는 제목 그대로 펠리니의 "8편 반째 만들어지고 있는 영화"(크리스티앙 메츠)다. <달콤한 인생>에 로마의 퇴폐적이고 나태한 부자들의 생활을 보도하는 기자로 나온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가 역시 주인공이다. 1
그는 신경쇠약을 치료하기 위해 온천장에 온 유명한 영화감독 '구이도'로 출연했다. 구이도는 우주로 도피하려는 제3차대전 생존자들에 관한 영화를 만들려고 한다. 그는 항상 동업자들, 제작자와 시나리오 작가와 배우들에게 포위되어 있다. 그들은 그에게 영화에 대한 의견과 생각을 쉴 새 없이 요구하고 질문을 해 대지만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는, 마침내 현실인식에 도달했을 때, 다시 말해서 자신이 인류를 위한 메시지를 담은 거창한 영화를 만드는 건 불가능하며 그 대신 자신의 혼란, 불확실성, 타협에 대한 복잡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깨닫고서야 예술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
<8과 1/2>은 흔히 모더니스트의 전통에 놓인 '의식의 흐름'의, 혹은 내적 독백의 영화로 분류되는데 여기서 펠리니는 주·객관적 시각을 교차시켜가며 관점의 복잡한 변화를 아주 기술적으로 구사한다. 구이도의 백일몽과 플래시백과 악몽을 돋보이게 해주는 건 '객관적' 장면들이다.
예를 들면 앞뒤로 꽉 막힌 상태를 암시하는 영화 시작 부분의 교통마비 장면은 구이도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도 그가 느끼는 폐소공포증적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그가 자동차에서 탈출하여 해방감을 느끼는 순간, 자유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의 발이 밧줄에 매달려 땅으로 당겨지는 장면을 통해 표현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그것 또한 구이도의 악몽임이 드러난다.
현실세계에 대한 구이도의 부적응은 성적 무능과 여성관계에서 드러난다. 그는 두 가지 여성상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다. 어린 시절 기억 속 한 자락을 차지하는 라 사라기나는 성욕과 순진함, 악마와 강력하고 두려운 생명력의 상징이다. 그의 뮤즈, 클라우디아는 환상 속에서 항상 그에게 무엇인가를 베푸는 이상적 여성이며 영원한 어머니 마돈나와 같다. 현실의 그는 또 자신의 정부를 창녀처럼 분장시키려는 욕구를 느낄 정도로 억압되어 있다.
<8과 1/2>의 1백35분(시중에는 2개의 비디오테이프로 나와 있다)동안 관객들이 보는 것은 구이도가 만들려는, 혹은 만들어놓은 영화의 내용이다. 그러나 이것은 영화를 만드는 과정을 담은 영화라기보다는 영화가 가야 할 새로운 방향을 찾기 위한 여행이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구이도는 "정말로 예술가라 불릴 가치가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의 창조적 생활에서 한가지 것, 침묵에 대한 헌신을 맹세해야 한다"는 말에서 힘을 얻어 원무를 연출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의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은 예술적 아이디어 고갈에 대한 작가의 두려움을 이 영화를 통해 그려보인 펠리니 자신의 미래를 보여주는 듯하다. 이후 그는 스펙터클과 기억의 환상에 더욱 집착하였고 단순한 배경과 향수로 격하된 역사의 묘사, 자전적 표현주의 양식에 너무 깊이 빠졌기 때문이다. 그는 예술가의 삶과 상상력의 산물에 예술가의 영감이 서려 있다는 이유만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낭만주의로 회귀하였다.
- 사람 이름이다. 영화 기호학의 선구자.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