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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디지털

[집단지성의 이해 III] 집단지성의 정의

피에르 레비의 <집단지성>에 보면 저자 스스로 집단지성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있다. "그것은 어디에나 분포하며, 지속적으로 가치 부여되고, 실시간으로 조정되며, 역량의 실제적 동원에 이르는 지성을 말한다." 그리고 부연해서 각각을 설명하고 있는데, 요약해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어디에나 분포하는 지성 : 누구도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한다. 모든 사람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 지식 전체는 인류 안에 있다.

1)항에 대해서 이의를 달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겠다. 어떤 전문적이라고 불릴 만한 분야라고 하더라도 논문이 쌓여가는 과정을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다만, 이것과 협업이라는 것과 연관짓게 됨으로써 사실 해석의 여지가 많이 발생하지만 여기서는 협업을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니 일단 배제하고 이해해야할 듯 하다.

1)항에서도 엿보이듯이 이러한 거시적인 관점, 인류학적 관점에서 보고 이해를 할 필요가 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고 현실의 어떠한 현상에 접목을 시키면 사실 논의의 여지가 많은 부분이라 생각한다. 인류학적 관점에서 보지 않으면 현실에서는 유토피아적인 견해가 될 수 밖에 없는 한계를 갖고 있다. 그것은 다음 항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2) 지속적으로 가치 부여되는 지성 : 가장 소중한 자원인 지성은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발전시켜 활용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예) 학교 성적표, 기업 선발 기준.
2)항에서는 지성이라는 것이 지속적으로 가치가 부여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작금의 시대에는 그것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역으로 얘기를 하고 있는데, 그 예로 학교 성적으로 순위를 나열해서 마치 지성이 순위매김이 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지성이라는 것은 그렇게 순위매김이 되어 가치가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지성만을 위해 가치가 부여되어야 하기에 그러한 작금의 현상들을 우려하는 부분을 책에서는 얘기하고 있다.

사실 이 부분만 보더라도 우리가 피에르 레비의 "집단지성"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는 명확하다고 본다.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는 피에르 레비의 말이 맞다 하더라도 어떠한 기준이 없이 모든 것이 다 옳다는 입장으로 처리를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단적인 예로 기업에서 사람을 뽑는다고 하면 1명을 뽑는데, 1,000명이 지원했을 경우 어떤 기준으로 사람을 뽑아야만 하는가? 하는 현실적인 문제를 "집단지성"의 관점에서는 해석하기가 상당히 애매한 부분이 발생하는 것이다.

결국 피에르 레비가 말하는 "집단지성"을 내가 인류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하는 이유도 다 이런 연유이고 만약 현실에 접목을 하게 된다면 유토피아적인 발상이 된다고 생각하는 이유도 이런 문제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집단지성"이라는 것이 왜곡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이 용어의 해석에 있어서 인류학적인 관점에서 접근을 해야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피에르 레비 조차도 예시를 들기를 학교 성적표나 기업 선발 기준을 예로 들었듯이 현실적인 부분을 언급하고 있기에 사실 문제가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아예 인류학적인 접근에서 얘기만 했으면 오히려 좋았을 것을.

허나 피에르 레비가 그렇게 얘기를 한 것은 이해를 시키기 위한 단적인 예를 든 것이라고 바라보고 이해해야할 필요가 있을 듯 하다. 피에르 레비가 말하는 지성이라는 것은 어떤 완료가 아닌 진행형이라는 관점에서의 해석을 여기서는 얘기하고 싶다.

그것은 동양 철학에서도 자주 엿보이는 부분으로 "인생은 끊임없는 부정의 연속이다."라는 표현과도 일맥상통한다고 본다. 2)항에서 주목해야할 것은 지속적이라는 것이다. 지속적이라는 말은 완료가 아닌 진행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3) 지성을 실시간으로 조정하는 것 : 디지털 정보 기술에 근거. 지역을 벗어난 집단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움직이는 의미 작용의 풍경 속에서 상호 작용하도록 하는 것이다. 사이버 공간은 탈영토화된 지적 공동체의 구성원과 지식 사이의 상호 작용이 일어나는 유동적 공간이 될 것이다.
3)항에서는 사이버 공간에 주목하고 있다. 이는 많은 다른 책에서도 보이고 요즈음 많이 회자되는 얘기들 속에서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기존에는 어떤 권위있는 일부의 사람들에게 지성이 독점되었다고 한다면 사이버 공간을 통해서 누구나 참여가능한 세상이 열리면서 달라져 가고 있다는 사회 현상에 레비는 주목을 한 것이다.

사는 지역에 국한되거나 제약을 받지 않는(탈영토화된) 사람들 사이의 상호 작용으로 지성이 실시간 조정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이 책의 겉표지에 나와 있는 문구인 "사이버 공간의 인류학을 위하여"라는 부분도 기존에 환경적 상황적으로 제약적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이제는 가능해졌다는 점을 여기서는 언급하고 있다.

4) 역량의 실제적 동원에 이르는 것 : 역량을 식별해야 하고 식별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모든 다양성 속에서 알아보아야 한다. 공식적으로 인준된 지식들은 오늘날 활동 중인 지식의 극소수에 불과하다. 반대로 지식의 다양한 폭에 따라 타인의 가치를 인정할 경우, 이는 새롭고 긍정적인 방식으로 정체성을 확보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동원에 응하게 된다.
여기서 주목할 키워드는 실제적이라는 것이다. 극소수의 전문가라 불리울 만한 사람들의 견해가 아니라 다양성 속에서 식별되어야 하기 때문에 다양성을 수용해야만 여러 지성들의 힘을 실제적으로 동원하여 지속적인 가치 부여를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양성이라고 하는 부분도 일반적인 관점에서의 다양성이라고 얘기를 한 듯 한데, <대중의 지혜>에서는 그 다양성의 기준이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그러한 기준은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의미를 보건대 <대중의 지혜>에서 제시된 기준을 따라도 무방할 듯 하다. 그것은 <집단지성> 책 곳곳에서 집단사고(GroupThink)를 다양성이라고 하지는 않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피에르 레비가 얘기한 "집단지성"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나름 집단지성이라는 것에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생각을 많이 해도 역시나 현실적인 부분에서는 유토피아적인 견해라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다. 그렇다고 그것이 useless 하고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라 인류학적인 관점에서 의미를 두고 해석하면 충분히 볼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얘기하고 싶다.

그러한 나의 관점은 아래의 인용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18C 후반 유럽의 경제적 비약을 가능케 했던 필요 조건들 가운데 하나는 지적 소유권에 대한 효율적인 법적 보호 장치 구축. 이로 인해 기술 혁신은 매력적인 것이 되었다. 그로 인해 기술 과학과 산업은 크게 도약.

비즈니스 관점에서 이러한 부분이 좀 더 나은 결과를 초래했다면, 이것이 더 의미가 있지 않느냐는 관점에서 해석이 가능하나 "집단지성"의 관점에서는 해석이 좀 다르다는 점이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면 <위키노믹스>에서도 이러한 기득권(저작권, 특허와 같은 지식의 법적 보호 장치를 통한 소유권, 독점권)에 대해서도 관점을 달리하고 있기에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할 필요가 있다는 점은 얘기하고 싶다.

그것은 피에르 레비도 사이버 공간이라는 현상을 주목하고 있고, 돈 댑스코트도 그런 현상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위키노믹스>는 생각해볼 문제이고 기업에서 전면 수용하라는 입장이 아니라 부분 수용을 하면서 어떤 것이 더 생산적이고 효율적인지를 얘기하고 있지만 <집단지성>에서는 지성은 계량화되어서는 안 되고 그것 자체에 가치를 두어야 하는 입장이다.

아무래도 비즈니스 관점을 우선시 하는 나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는 그래서 <위키노믹스>의 관점에 동의를 하고 <집단지성>은 인류학적인 부분에서 이해를 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게 아니면 좋은 점을 수용하지 못하게 되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1회 위키노믹스 포럼에서 이런 얘기를 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럼 가만히 놔두면 다 되는가?" 어떤 개입의 여지 없이 가만히 놔두면 자연발생적으로 뭐가 되는가라는 나의 관점에 대해서 피에르 레비의 책에서는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무질서나 절대적 상대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행위들이, 맥락 속에서 지속적으로 재평가되는 수많은 기준들에 따라 실시간으로 조정되고 평가되기 때문이다.
나 또한 집단지성에 대해서 다른 블로그에 덧글을 달 때 어떤 잘못된 정보가 들어와도 다른 사람이 그것을 수정하는 것이 지성이라고 했고 전문적이지 못한 글이라도 그 글을 통해서 힌트를 얻고 아이디어를 얻어 뭔가 더 나은 것을 해내는 것이 지성의 힘이요 집단지성이 무서운 이유라고 언급을 했었다.

그런 관점을 모르는 내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것은 유토피아적인 견해라고 얘기를 하는 것은 단정을 지어버렸기 때문이다. 피에르 레비가 말한 "집단지성"이라 부를 만한 것이 되려면 어떤 상황적 조건을 만족시키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고 현실에서는 그러한 상황적 조건이 너무나 시간적으로 변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집단지성"을(적어도 피에르 레비가 말한) 인류학적인 관점에서 보고 그 의미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런 부분들에 대한 문제 때문에 <위키노믹스>에서도 단순히 협업이라고 칭하지 않고 mass 라는 말을 붙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어떤 정의나 기준이 맞다 틀리다를 떠나서 용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 우리가 용어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가 뒷받침 되어야 서로 간의 의사소통이 용이할 것이다. 나는 A를 두고 "집단지성"이라고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B를 두고 "집단지성"이라고 하면 용어는 같지만 관점이나 해석이 달라질 수 밖에 없기에 이런 글을 적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다양성의 관점에서 이러한 나의 견해도 옳다 그르다는 가치 판단의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재평가되고 다른 이들에게 조정될 수 있는 하나의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를 마련해준 PRAK님께 감사의 말씀 드린다. 그 분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이런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고 그냥 쉽게 넘겨버렸을 듯.

+ 집단지성과 협업지성 그리고 군중심리 등에 대한 더 읽을거리 → 집단지성? 협업지성? 군중심리?